런던 여행의 출발선
인천에서 히드로 국제공항까지, 12시간가량의 비행시간은 그리 환영받을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종류의 차량이든지 일단 자리를 잡으면 바로 잠들어 버리는 것이 나의 자랑할만한 특기인데, 이런 능력이 대한항공 KE907 편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기상 악화로 3시간가량 항공편이 연착되면서 여행의 도입부가 완전히 어그러진 것부터가 문제일 수도 있다. 아니면 간단한 짐을 꾸리기 위해 가져 간 핸드폰의 기본 이어폰이 3.5파이 단자가 아닌 아이폰 용 8핀 이어폰이어서 기내에서 전혀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불편한 기내 배치용 헤드폰을 사용하느라 진땀을 뺐는데, 미리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니 뭐라고 불평할 건더기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덕분에 앞에서 엉클어진 나의 바이오 리듬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런던 여행의 첫 단추가 엉뚱한 데에 끼워져 버린 기분이 들어서 우울한 기분마저 들던 바로 그 순간, 나는 나의 오랜 친구인 메리 포핀스를 발견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런던의 겨울과 따뜻한 꽃잎이 흩날리는 봄, 그리고 아기자기한 체리 트리 레인. 메리 포핀스가 보여주는 영상 속 세계는 나에게 다시 한번 런던을 향한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나는 이내 직전의 우울감을 털어낸다. "그래, 이 걸 보려고 내가 런던에 가고 있는 거지."
메리 포핀스를 이어 후드, 아가사 앤 더 트루스 오브 머더 등의 영국 배경 영화로 겨우 겨우 열두 시간을 연명한 끝에 런던에 당도했다. (후에 본 두 편의 영화 모두 완성도가 꽝이므로 굳이 찾아보는 것을 추천하지 않겠다.)
비행기의 창문을 통해 처음으로 마주한 런던은 구획에 맞춰 지어진 비슷비슷한 외양의 낮은 갈색 건물들과 초록색으로 뒤덮인 공원 때문인지 왠지 모를 오가닉한 느낌을 주었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고 할까. 거기에 더해 또 한 가지 나를 놀라게 한 사실은 위의 사진이 찍힌 시간이 오후 아홉 시를 훨씬 넘겼다는 점인데, 런던의 일몰 시간을 미리 체크하지 못한 나의 이 작은 불찰은 추후에 있을 런던 야경 감상 계획에 큰 지장을 미치고 만다.
사실 런던 여행에 있어서 내가 겁을 먹었던 주요 부분은 이미그레이션이었다. 워낙 빡빡하기로 소문이 자자하기도 했고, 잘못 걸리면 한 시간 동안 질문의 홍수에 빠질 수 있다는 리뷰를 보기도 한 데다 이런 특성 때문에 대기 시간이 매우 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이 축복을 받았기 때문인지, 5월 중순 즈음부터 영국에서 한국인의 자동출입국심사가 가능해졌다. 그래서 정말 별거 없이 10분 만에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할 수 있었다. 자동출입국심사 대상 국가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서 줄을 서 있다가 여권을 스캔하고 얼굴 사진을 찍으면 끝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 내 친구는 대 여섯 번의 시도에도 끝까지 얼굴이 인식되지 않아 결국 출입국심사관에게 가야 했다. (사람이 아닌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 중)
생각보다 훨씬 편리하게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한 나의 다음 목적지는 러셀스퀘어에 위치한 한 호텔이었는데, 이를 위해 자판기에서 오이스터 카드를 구입•충전한 뒤 거기에 다시 7일짜리 트래블카드(1•2 존 용)를 탑업했다. 트래블카드는 정해진 기간 동안 런던의 정해진 구역에서 대중교통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카드인데, 기차역에서 별도로 구입할 수도 있고 나처럼 오이스터 카드에 탑업 할 수도 있다. 단, 이 경우 히드로공항은 4존에 해당하므로 따로 파운드를 어느 정도 충전해 줘야 한다. (4존까지 이용 가능한 트래블카드는 너무 비싸다.)
만약 가지고 있는 해외결제용 카드에 컨택리스 결제 기능이 있다면 그 카드를 교통카드처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가 가지고 간 하나카드에 해당 기능이 있었지만, 오이스터 카드가 가지고 싶어서 따로 구입했다.) 꼭 교통카드 용이 아니더라도 이 컨택리스 결제 방법이 런던에서 소소한 것들을 쇼핑할 때에 매우 편리하므로 가능하다면 챙겨가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서명도, id도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냥 단말기에 카드를 살짝 갖다 대기만 하면 결제가 완료되기 때문이다. 단, 30파운드 미만 금액에만 사용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30파운드가 넘어갈 경우 ic칩을 인식시켜서 결제해야 하는데 이 경우 서명이 필수이고 경우에 따라 id를 요구받을 수도 있다.
런던 지하철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다름 아닌 나니아 연대기 영화이다.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에서 남매들이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나니아로 다시 소환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대전 직후쯤이다. 지하철이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었구나! 싶어서 런던 지하철의 역사에 대해 검색해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백과사전을 뒤져 보니, 런던 지하철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첫 개통은 무려 1863년. 그래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런던의 지반과 터널을 만든 시기의 기술때문에 우리나라에 비해 열차가 비좁을 것은 이미 예상이 되었고, 거기에 더해 지하로 들어가면 데이터가 안 터지고 더운 여름에는 무려 창문을 열어놓고 달린다는 후기를 이미 접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지하에서는 데이터가 터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하에 있는 동안에는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아 보거나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확인해 보는 것이 불가능 했다. 덕분에 안내 방송에 초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90년대쯤의 아날로그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옛날엔 여행 다니기 참 어려웠겠구나 싶어서 새삼스레 스마트 폰과 인터넷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다행이었던 점은 히드로공항에서 러셀스퀘어역 까지 가는 길에는 지상 구간이 꽤 있어서 잠깐잠깐씩 데이터 수혈이 되었다는 사실.
차량 내부가 좁은 것은 마침 사람이 적은 시간대라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환기창을 열어놓은 지하철의 모습이 조금 신기하긴 했지만 덕분에 시원해서 나름 괜찮았다. 콧구멍 속이 까매질 것 같은 걱정은 좀 들었지만. 하지만 여행 중 지하철을 이용할 때는 불편했던 적이 꽤 많다.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작은 차량에 사람이 복작거릴 때면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라인과 차종에 따라 에어컨이 나오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내가 주로 탄 라인은....... 또르르.
히드로공항 4터미널에서 피카딜리선을 타고 한 시간 정도를 달리면 러셀스퀘어 역에 도착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블룸스버리에 숙소를 잡았으니, 그녀가 사랑했던 크고 작은 스퀘어들을 모두 둘러 볼 생각을 하며 런던에서의 첫 번째 밤을 맞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