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할 자유가 있는나라, 스리랑카
파우, '불쌍하다'라는 뜻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 단어를 늘 습관적으로 달고 산다.
눈 앞에 모기를 잡아도 파우,
벌레를 봐도 파우,
개미를 잡아도 파우,
혼자 사는 선생님을 보면 파우,
그런 선생님의 엄마도 파우,
우리도 파우,
모든 것이 파우한 세상
처음엔 파우가 이상했다.
하지만 이젠 파우해지는 것도,
누군가를 파우하게 보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일인지 알 것 같다.
누구나 파우할 자유가 있는 나라
스리랑카.
집 주인 아줌마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파우하다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밥도 해먹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잠도 자야 하는 내가 불쌍해 보였나 보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동정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왜 불쌍한가, 나는 나름의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스리랑카 캔디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려는 것인데, 온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야기 할까, 하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 보니 한국의 불쌍하다와 스리랑카의 파우의 뜻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년을 마무리하고 돌아 보니 파우만큼 따뜻한 단어가 세상 없었다.
한국에서의 불쌍하다는 말은 값싼 동정의 표현이다. 그렇기에 친구끼리야 장난으로 불쌍하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진짜 불쌍한 사람이라는 그 단어를 자주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에게 '불쌍하다'는 그냥 내가 도와줄 사람이라는 뜻이다. 창피할 필요는 없이, 그냥 그런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단순한 생각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돕는데 인색하지 않는다. 먹을 것이 없는 이웃, 자신의 집 앞에 사는 고양이, 강아지 등을 도와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다.
스리랑카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열악한 경제상황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의 나눔은 열악하지 않다. 처음 스리랑카에 왔을 때 거지에게 아무렇지 않게 적선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거리 위에 엎드려 있는 거지들에게도, 버스에 타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이들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돈을 내어주는 스리랑카 사람들의 모습에서 작은 감동을 느꼈다. 또 길거리에 있는 작은 생명들이 집에 찾아오면 꼭 음식을 내어주는 그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 따뜻한 이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파우해지기 좋은 나라이지 않을까,
우리 반 아이들은 나에게 자주 먹을 것을 가져다 주고는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선생님이 파우해서, 이역만리 먼 땅에 가족없이 홀로 지내는 선생님이 안타까워서이다. 결혼도 안한 채 혼자 사는 선생님이기도 하고 매일 빨래, 음식 등을 스스로 한다고 했더니 아이들의 시선에서는 내가 불쌍해 보였나보다.
우리의 시선으로 보자면 불쌍한 건 내가 아니라 우리 학생들이었다. 물론 아이들의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넉넉하지 못한 상황을 넋두리하듯 털어 놓는다. 그렇다고 남의 불행에 귀를 닫고 살지 않는다. 내 상황이 어려울 지라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불쌍하다면 달려가 도와준다. 아이들에게 불행은 상대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많이 가진 이도 때론 파우할 수 있고, 가지지 못한 이도 파우한 누군가를 위해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파우'가 늘 좋은 건 아니다. 아이들은 시도때도 없이 '파우'라는 말을 쓰면서 나를 괴롭혔다. 하루는 쪽지시험 시간을 보는 날이었다. 앞에 있는 아이가 컨닝을 하길래 가서 혼을 냈다. 그랬더니 되려 보여준 친구가 시험지를 본 친구를 가리키며 '파우'하다는 것이다. 공부를 못해서 시험을 못 본 친구를 위해 도와줘야 한다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거기서 그 단어가 왜 나오니, 그렇게 아이들은 공정성을 요구하는 시험, 출석에 '파우'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나를 난처하게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일들은 주변에서도 왕왕 일어났다. 정말 난처했다. 공정함과 파우 사이, 뼛 속까지 한국인인 나는 세라이하게(무섭게) NO라고 이야기 해줬다.
그래도 파우가 있는 스리랑카는 살만한 나라이다. 세상 만물을 모두 파우하다 여길 수 있는 곳, 또 누구나 파우해질 수 있는 곳, 그것이 창피하지 않은 곳, 이것이 내일을 불안하지 않게 여기는 보험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살기 퍽퍽한 나라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