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차에 초음파에서 심장 소리를 확인하지 못했고
한 주를 더 기다렸다. 물론 다시 심장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제 9주차 여전히 내 몸은 미련이 많이 남아 아이를 보내주지 못했고
나는 그런 내가 답답하고 입덧이 답답해 어서 멈추고 싶었다
지피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레퍼럴을 받아 하루를 기다려 병원 예약을 잡았다
이 병원을 미드와이프 보러 올 줄 알았는데 반대의 이유로 찾게 되었다.
호주에서는 일주일 정도 차이를 두고 초음파를 해야 정확히
유산선언을 할 수 있는데 나는 6일 뒤에 다음 초음파를 했기 때문에 다시 하자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아이와 다시 마주했고 왜인지 초음파하는 내내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임신호르몬의 탓으로 돌렸다
그렇게 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나의 임신실패를 증명하고 소파술을 예약할 수 있었다.
그 다음날 오전 7시에 병원문을 들어섰다
나는 당장 죽는 병이 아니라 당장 심각한 이들이 들어오면 한 걸음씩 뒤로 밀렸다
병원 침대에서 많은 이들의 고통을 들으며
애써 웃어보려 했고 최대한 담담한 사람인척 해보고 싶었다
한 간호사는 자기도 유산했지만 벌써 자식이 셋이라며
괜찮을 거라고 했다. 나도 안다 괜찮겠지 근데 현재가 너무 슬프다.
사실 나도 이 정도로 슬플 거란 생각 안해봤는데 여전히 슬프다
임신호르몬 탓인가?
하지만 사람들의 위로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온 병원을 돌아 다녔다
수술 전에 의사가 다가와 이렇게 만나게 되어 유감이라며
한 번 더 나를 울려버렸다 나는 토끼눈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회복실에서는 마취도 금방깨고 돌아와
12시간의 금식 끝에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었다.
호주 병원은 느리지만 따뜻했다
사랑을 느끼고 왔다.
하지만 그 뒤에도 여전히 운다
그렇다고 항상 슬픈 건 아니다
아직 딱지가 앉은 자리에 새살이 돋지 않아
불안정할 뿐
가끔가다 실수로 건들여지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는 한다.
나에게 와주지 못했던 봄
그래도 봄은 겨울보다 강하니까
너도 나에게 와 줄 날이 오겠지?
글이 주는 치유의 힘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오늘의 슬픔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네이버 블로그에는 아는 친구들이 있어
누구도 모르는 광장 한 가운데에 나의 이야기를 놓아본다
3주간의 임신이었으니 삼주가 지난 오늘 뒤에는 조금 잊혀질 수 있을까?
나와 같이 유산에 관한 오만 블로그를 찾아 볼 누군가에게
소소한 위로를 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