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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안 Sep 18. 2020

포스트 IMF 네이티브의 희망은 정치다

  


아는 건 많이 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한국 사회의 변곡점은 크게 두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박정희 (집권 시기). 다른 하나는 IMF 경제위기. 


전자의 인간은 한국 사회의 병영화를 이끌었다. 민중들을 권위적 기구들을 이용해 짓밟았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나도 위험할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 폭력의 공포가 사회를 뒤덮도록 만들었다. 마치 그가 평생을 보낸 군대처럼. 그 한국 사회에는 위계질서에 대한 순응, 비합리를 용인하는 태도, 성과 위주의 물신성이 자리 잡았다. 한국의 극우성, 권위주의적 문화를 구성한 인물이다.


후자의 IMF 경제위기(이하 IMF)는 한국의 각 집단에 숙제를 던져주었다. 정부는 권위적 개발정부의 망령이 잔존한 국가의 혼란을 해결해야 했다. 기업은 막대한 손실을 입은 동시에, 이전과 같이는 기업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인은 안정적인 밥벌이를 구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현실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렇듯 IMF는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필연적 개악’을 강요했고, 그 결과 무너지는 경제 상황의 대안으로 신자유주의 체제가 자리 잡았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사후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희망을 박탈했다. 전무했던 대규모 실업 현상 이후의 시대를 사는 청년들은 안정적 직장을 갈망했다. 청년들의 고학력화 현상은 치열한 취업 경쟁과 비정규직 형태의 노동환경을 낳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일상을 잠식한 청년들은 사회를 냉소적으로 대했다. 정치 참여는 줄어들었고, 청년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가도 계속해 줄어들었다. 


IMF의 직격탄을 맞은 시대를 경험한 사람은 아니지만, ‘포스트 IMF 네이티브’로서 나의 삶은 97년 이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포스트 IMF 시대’가 남긴 신자유주의 체제의 학생들의 불안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 


이전까지 삶에 큰 영향을 주지 않던 성적은 내게 뚜렷하고 구체적인 공포로서 다가왔다. 성적과 미래의 삶을 결부시키는 주변인들의 언급, 불확실한 이상은 나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무엇보다도 걱정을 떨쳐내기 위해 작은 즐거움을 찾으려 할 때마다 스며드는 불안이 가장 괴로웠다. 입시를 위한 경쟁과 성적 줄 세우기에서 자유로울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온 학교였지만, 나는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바다 위의 섬처럼 동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학교에 대한 불만보다는, 과거 입시불안에 시달리지 않겠노라고 끊임없이 되뇌고 다짐했던 결의가 ‘현실’이라는 이름 앞에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 슬펐다. 작금의 괴로움은 ‘명성 있는 상급학교로 진학해야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실체가 있다. 절대적이지 않으나, 사회 구성원들을 충분히 학벌주의라는 획일적 가치에 종속되도록 만들 수 있다. 무한경쟁 사회의 일원인 내가 팍팍한 사회를 만드는데 완전무결한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나와, 그리고 같은 시기를 불안에 휩싸여 보내는 ‘포스트 IMF 네이티브’들의 삶이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체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한 이후로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지난해, 한 청소년 교육 단체에서 선거권 연령 하향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관련 주제에 관심이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다. 흥미로운 프로젝트였으나, 나는 한 주 만에 탈퇴했다. 도저히 학교생활과 이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현실과 타협했다는 씁쓸함을 뒤로하고, 나의 이상을 헛되이 사그라트리지 않기 위해 그때부터 나는 나의 괴로움을 대변해줄 대중 정치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또 한 번의 좌절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전화위복이 되어 삶의 지향을 향한 동력이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는, 어쩌면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라고도 할 수 있는 구석으로 ‘정치’를 떠올린 것을 독특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정치 효능을 느끼기 힘들어 하는 시대에 이게 웬 뜬구름 잡는 소리야,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에 대한 막연한 신뢰가 있다. 한 사회의 정치집단(조직), 정치가, 정당은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정치의 기본 목적은 사회 구성원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따라 모든 정치 어젠다의 근원은 “어떻게 하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게 행복할 수 있는가?”이다. 집단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이들은 지지 기반이 될 대중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가치를 어필한다. (포퓰리즘과는 다르다) 나는 정치의 참된 목표가 불안 속에서 헤매는 나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나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 신자유주의의 산물로 괴로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정치를 찾아 헤맸고, 여전히 헤매고 있다. 부끄럽지만 오랜 기간 정치를 ‘승자’와 ‘패자’, ‘내 편’과 ‘다른 편’으로 구분해 표를 주고받는 하나의 스포츠로 인식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진영 논리의 레토릭에 빠진 이분법적 구분이 사회 구성원들의 질 높은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를 장악한 ‘포스트 IMF 시대’의 폐해를 맞닥뜨린 시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가 필요하다. 시민들에게 올바른 사회 진보의 방향을 제시해 줄 정치집단이 필요하다. 불안에 잠식당한 삶을 사는 청년들과 함께할 조직이 필요하다. 쉽게 분노하지 않고 사실을 중요히 여기며, 시민을 선동하는 ‘어용’ 노릇을 하지 않을 미디어가 필요하다. 나와 같은 처지의 개인들의 불행을 대표하고 해결할 정치는 절대로 일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포스트 IMF 시대’의 사회 모순을 고민하는 정치는 가장 시민의 삶과 밀접한 곳에서 발생해 거시적 사회 변화 담론을 이끌 것이다.     

 

여성운동의 급진적 변혁을 일으켰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 라는 문장이 있다. 나와 당신의 개인적 괴로움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 사적 영역의 문제를 조직과 연대를 통해 사회 변화로 이끌어 내는 일, 최근 내 삶에서는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참고 문헌


군사독재와 반공주의, 그리고 ‘우리 안의 군사문화’, 조현연

IMF 키즈의 생애, 안은별, 코난북스

한국사회 청년층의 사회적 배제, 2009, 이성균

대학 학벌이 대졸자의 첫 취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 2014, 김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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