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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Feb 11. 2022

저 소설 써요

작가가 별건가

J가 물었다. “정말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숨을 가다듬고 답했다. “소설, 쓰는 거요….” 잠시 수줍었다. 10년 전, 여러 편의 소설을 완성하고서도, “저, 소설 써요.”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나에게 소설은 아직도 비밀스러운 영역이다.


대학 졸업 후 결혼까지 4여 년의 ‘나’는 ‘임용 준비생’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나는 스물여섯부터 스물여덟까지 미친 듯이 읽고 썼다. 도서관에서 교육학 강의를 듣자니, 서가의 소설이 아우성쳤다. 문학사에 밑줄을 긋자니, 나의 역사가 쓰고 싶었다. 부모님도 연이은 임용 실패에 낙담했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아버지도 국어 교사보다 소설가를 원했으니, 등단은 아름다운 출구였다.


십여 곳에 원고를 보냈지만, 소식이 감감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이야기…. 내 인생에서 ‘소설’이라는 글자를 지웠다. 처음부터 이 누추한 결말을 예상하고, “저, 소설 써요.”라는 하지 못했나. ‘나 같은 게 감히 소설가를 꿈꾸다니….’ 자격을 반문하며, 눈물을 삼켰다. 실패한 ‘나’를 신음도 못하게 틀어막고, 마음 깊은 곳으로 박제했다.


《엄마의 책장》 출간을 앞두고, 그때의 ‘나’를 펼쳤다. 먼지만 쌓였을 뿐, 얼어붙은 마음 그대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넷부터 스물여섯까지 신촌에서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했고, 스물여섯부터 스물여덟까지 도서관에서 소설을 썼다. 이 한 문장을 내놓는데, 참 오래 걸렸다. 복잡하고 심오한 ‘나’를 해명하려고 길게 늘였다가 모두 지웠다. 망해버린 ‘나’를, 되지 못한 ‘나’를 들키는 일이니까…. ‘소설’은 나에게 지금껏 해결되지 않은 과제이다. 이 도저한 고민이 발각될까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그 시절을 회상했다.


부천종합운동장역에서 내려 진달래 동산을 지나면 원미도서관이 있다. 원미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한참을 올라야 도서관 입구에 다다른다. 3층 여자 열람실 11번 칸막이 책상에는 재수생 윤혜린이 있다. 2층 디지털 자료실 긴 탁자에는 습작생 윤혜린이 있다. 지하 식당 창가 자리에는 혼밥족 윤혜린이 있다. 원미공원에 세워진 장대한 현충탑 근처에는 사색가 윤혜린이 있다. 조국을 위해 죽은 이들의 조각상을 보며, 나도 이 사회에 받아들여지길 기도했다. 저 멀리 보이는 부천 시내, 66층짜리 쌍둥이 건물 리첸시아와 12개의 두산 위브 더 스테이트가 영영 갈 수 없는 곳 같았다.


도서관은 숨어들기 좋았다. 젊은 청춘들이 화석처럼 걸어 다녔다. 늘어진 옷, 덥수룩한 머리, 핏기 없는 얼굴이 익숙했다. 서로에게 아무도 말 걸지 않았다. 저마다의 막막함을 각자의 꿈으로 견디다가, 그곳을 떠날 때 비로소 웃었다. 벗어났다가 6년 만에 돌아온 ‘나’를 누가 알아볼까 겁이 났다.


“3천 원짜리 하나 주세요.” 매주 매점에서 복사카드를 샀다. 200자 원고지 80매 내외 단편소설을 A4용지에 인쇄하면 아홉 장 남짓. 스테이플러 고이 찍어, 도서관을 나섰다. 벚나무 길을 지나 20분 정도 걸으면 시장 끝 쪽에 원미 우체국이 있었다. 겉봉투에 ‘응모분야 – 소설’이라 또박또박 적어, 파주시 문학동네, 마포구 창비 서교빌딩, 중구 경향 신문사 등으로 보냈다. 응모에서 발표까지 두 달 정도 걸렸는데, 공고일에 임박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심장이 날뛰었다. 수화기 너머로 보험 권유나 카드 혜택을 알리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리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지만, 마음은 바닥으로 침몰했다.


가끔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울었다. 반 평도 안 되는 그곳만이, ‘정숙’ 위배되지 않고, 흐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원고가 휴지가 되는 결론이 오히려 당연했다. 그때 울었다면 어땠을까. 그때 소리쳤다면, 소설을 떠나 소설로 돌아가는데 이토록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다. 문체를, 사건을, 인물을, 배경을, 소재를 보며 ‘나도 이 정도는 쓰지’라며 조소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에 못 미치니, 사납게 질투했다. 내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소설(小說), 말 그대로 작은 이야기. 그런데 그 시절 나에게 소설은 컸다. ‘글’이라는 ‘신’을 모셨다고 할까.


작년 10월부터 ‘교회 가기 싫은 날’ 연재를 시작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예배를 드렸던 내가 2020년 6월 교회를 떠났다. 내가 누군가를 이토록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나를 이토록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요즘 그 일이 힘에 부쳤다. 버젓이 잘 살고있는 목사를, 아직도 그곳이 좋다는 교인을, 우리집에서 훤히 보이는 교회를, 날 선 눈으로 조목조목 따지는 것이 괴로웠다. ‘너는 얼마나 잘 났다고?’, ‘쓸수록 외로워질 거야’라는 목소리가 나를 휘갈겼다. 글을 써놓고 올리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J가 말했다. “지금까지 연재한 에세이를 소설로 쓰세요.” “네….”라고 답하는 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들뜸 끝에 두려움이 찾아왔다. ‘난 할 수 없어…. 내가 무슨 소설이야.’ 지난 10년 동안 수없이 되뇐 말이었다. 경기 히든 작가에 당선되어 출간을 하고서도, ‘에세이스트’라는 수식이 어색하고 찜찜했다. 나에게 조금 과분하고, 어딘가 빗나간 말 같았다.


에세이를 쓸 때, 소설을 쓰듯 썼다. 여전히 소설가는 아니다. 이제 에세이 쓰는 마음으로 소설을 써야지. 10년 전 소설을 쓸 때, 내가 알지 못하는 감정, 닿지 못한 생각, 살지 않은 경험을 부풀리느라 발버둥 쳤다. 모든 소설은 굳이 ‘자전적 소설’이라 구분하지 않아도, 이미 ‘자전적’이다. 내가 아는 감정, 닿은 생각, 살아본 것을 그저 나답게 쓰겠다. J에게 했다. “목사랑 결혼해서 이혼하는 사모 이야기 쓰고 싶어요.” 오래전부터 구상해서, 이미 내가 되어버린 이야기였다.


10년 전, 매섭게 글을 쓸 때는 스물셋에 등단한 김애란과 스물여섯에 등단한 윤성희만 봤다. 그녀들을 보며 날마다 조급했다. 소설을 접으며, 마흔에 등단한 박완서, 마흔셋에 등단한 황여정(황석영의 딸)을 품었다. ‘언젠가….’라는 막연함 곁에 조심히 선다. 미루기만 하다가 영영 꺼내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소설과 화해한다. 소설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냥 쓴다.


L이 말했다. “사상가가 별건가라며 말을 했다. 작가가 별건가라며 글을 썼다. 열등감의 이면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나는 나를 확인했다. 말이 간결하지 못할 때, 글이 깔끔하지 못할 때, 윤혜린의 《엄마의 책장》을 뒤적인다. 지금도 무언가 써야 하는 나는, 글줄이 잡히지 않아 멍하게 있던 나는, 윤혜린의 글을 읽고 달라진 마음의 결로 글을 쓸 용기를 얻는다.” 힘을 낸다.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 소설은 작다.


Photo by whereslug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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