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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Mar 11. 2022

온전히 사랑하고 싶다

지안이는 내가 상실한 ‘나’이다

  지안이가 하늘이를 불렀다. “누나 그림 그리게 포켓몬 책 빌려줘.” “싫어.” 하늘이가 책을 숨기며 도망쳤다. 지안이가 달래듯 입을 열었다. “잘 그려서 너도 하나 줄게.” 하늘이는 더 움츠러들었고, 결국 지안이가 소리쳤다. “치, 내가 인쇄해서 그릴 거야. 넌 못하지?” 지안이가 컴퓨터를 켰다. 하늘이가 그제야 누나에게 책을 내밀었지만, 기차는 이미 떠났다. 전원 켜는 소리가 부웅 자동차 시동처럼 당당했다. “엄마, 이거 어떻게 뽑아?”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책상으로 갔다. “마우스 오른쪽 눌러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버튼 눌러지는 걸로 다시 찾아봐.” 다시 싱크대에 섰다.


  1분도 되지 않아 아이가 외쳤다. “엄마, 안 돼.” 내가 고무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그러면 스크랩해야 돼.” ‘뽀로로, 신비 아파트, 시크릿 쥬쥬도 내 블로그를 침범했는데, 이제 피카츄까지….’ 내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너 네이버 메일 만들었잖아. 블로그도 개설해서 네가 스크랩해. 우선 로그인부터 해.” 나는 물기 묻은 장갑에 손을 쑤셔 넣었다. “엄마, 내 아이디 뭐지?” “그걸 엄마한테 물으면 어떡해?” “엄마가 어디 써놨잖아.” 고무장갑을 벗어 싱크대에 던지고, 아이에게 걸어갔다. 발걸음이 거칠었다. “네가 알아서 한다며, 이게 네가 하는 거야, 엄마가 하는 거야? 지금 엄마가 일 하다가 몇 번 왔는지 알아?” 큰 죄를 지은 듯, 아이 눈빛이 숙연했다. 숨을 고르고,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엄마가 지금은 가르쳐 줄 수가 없어. 방에 들어가서 밀린 일기랑 독서록부터 써.” 첫째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숨이 오르락내리락, 눈가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남편이 물었다. “지금 싸우는 거 아니지?” “설거지하는데 계속 부르잖아.” 남편이 어깨를 토닥였다. 달그락, 툭, 그릇 소리만 집안을 메웠다. 내 안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이게 화날 일인가? 피카츄 프린트 해달라는데, 왜 이렇게 성질이 나지?’ 접시는 접시대로, 밥공기는 밥공기대로 세척기 안에 넣었다. 세재를 넣고 기계 문을 닫자, 내 마음도 윙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힘들어. 학교에서도 요구 많은 아이들을 싫어하잖아. 나는 요구하지 않는 아이였어. 아무리 말해도, 답은 무음….’ 물기를 닦는 노란 행주가 처량했다. ‘그런데 둘째보다 첫째가 더 힘들어. 그건 왜 일까?’


  둘째에게는 눈까지 웃는데, 첫째에게는 입만 웃는다. 둘째를 안으면 입을 맞추는데, 첫째가 안기면 입이 돌아간다. 두 아이와 자려고 누우면 몸이 저절로 둘째 쪽으로 기운다. 둘째가 다리를 내 허벅지 사이에 넣어 내 온몸을 휘감고 자도 숨결이 곱기만 한데, 첫째가 가까이 오면 답답하다. 지안이가 “엄마는 하늘이 더 좋아하잖아.”라고 공격하면 손사래를 쳤지만, 가슴은 움찔했다. ‘이건 엄마로서 자질 문제야.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했는데….’ 나를 의심했다. 주문을 외우듯 첫째에 대한 사랑을 연습했다. ‘깨울 때 무조건 뽀뽀하자.’, ‘학교에서 오면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하자.’ 일종의 의무였다.


  “둘이 똑같아.” 나와 딸아이를 보며, 남편이 하는 말이다. (바뀔 수도 있지만) 나와 첫째는 MBTI 성향도, 에니어그램 유형도 같다. 지안이는 잃어버린 ‘나’, 살아보지 못한 ‘나’다. 유한 아버지를 만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나도 지안이처럼 언제나 떳떳했을 것이다. 첫째는 방과 후 요리를 배우자 요리사를, 동계 올림픽을 보자 쇼트트랙 선수를, 드라마를 보자 배우를, 음악프로그램을 보자 아이돌을 꿈꿨다. 다 잘할 수 있는데, 하나만 골라야 해서 어렵단다. 거울을 보며 “내가 좀 예쁘지.”라고 할 때는 웃음만 나온다. 동생 장난감을 몰래 가지고 놀다가 들켜도 “내가 빌려달라고 했으면, 네가 빌려줬겠냐?”라고 도리어 큰 소리를 친다. 3학년 때 반장을 하고 싶다고, 1학년부터 공약 준비를 했다. 이른 귀가로 돌봄 교실 간식을 못 먹은 날이었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내일 선생님한테 핫도그 달라고 할게.” “아니야, 먹고 싶으면 엄마가 사줄게.” “간식비 낸 거잖아. 내가 그런 말도 못 하겠어?” 둘째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첫째는 이모부가 있어도 씻고 나서 발가벗고 나오지만, 둘째는 누나만 있어도 씻고 나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나는 첫째처럼 태어났는데, 어쩔 수 없이 둘째처럼 자랐다.


  ‘내면 아이 치유’라는 문을 연 것은 그 때문이다. 아이에 대한 나의 반응이 과했다. 불끈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몇 자 적었지만, 쓸수록 모호했다. 책장에 꽂힌 존 브래드 쇼의 《상처받은 내면 아이 치유》를 펼쳤다. 사놓고 지나치듯 읽고 나서, 언젠가 씹어 먹듯 봐야지 미뤄둔 책이었다. 가만히 앉아 묵상하며, 내 안의 갓난아이, 두 살 아이, 다섯 살 아이를 차례대로 만났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성이 아니라 경험으로 헤아렸다.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전혀 몰랐던 내가 있었다. 모든 것이 자기 탓인 양 주저앉은 아이를 일으키기 위해, 나를 다시 해석했다. 오래전 덮어놓은 기억들이 먼지를 헤치고 폴폴 나에게로 왔다. ‘나만이라도 기억했어야 하는데, 나조차 묻어버렸어. 미안해.’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의식 안으로 숨어들어, 이유 없이 억울한 ‘나’로, 모질게 분해하는 ‘나’로 움찔댔다. ‘나’만이라도 알아주어야 했다. 이제라도 꺼내야 했다.


  나는 1985년 추운 초봄,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손이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첫 손주인 나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태아의 건강과 지혜를 위해 기도했고, 삼촌과 고모도 나를 애중했다. 내가 태어나자, 엄마는 나를 먹이고, 재우고, 씻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엄마가 말했다. “너 태어났을 때, 삼촌도 제대를 했어. 갑자기 식구가 두 명이 늘어난 거야.” 15평짜리 다세대 주택에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삼촌과 내가 살았다. 모두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는 엄마를 미워했다. 집안 곳곳에 저마다의 증오가 떠다녔다. 갓난아기인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불신을 들이마셨다. 엄마의 젖에서는 불안의 맛이 났다.


  할아버지는 밤마다 소주 반 병을 비워야 잠에 들었다. 수발은 엄마 차지였다. 아기는 엄마와 같은 존재로 태어난다. 두 살 무렵까지 엄마를 자기 자신이라고 느낀다. 할아버지는 갓난아기인 내 몫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상처를 타고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이라는 역사에 닿는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차남 몫의 유산은 없었다. 할머니는 일곱 살에 엄마를 잃었다. 시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할퀴었고, 그 짐은 고스란히 아버지와 고모, 삼촌의 것이 되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약한 장남’이었다. 내 손가락에 안 아픈 손가락이 있듯,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안 아픈 손가락이었다.


  태초에 두려움이 있었다. 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앉기 전에 다툼을 익혔고, 말하기 전에 싸움을 배웠다. 소리 지르고, 던지고, 울고, 말리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고자질했다. 속상해도, 부끄러워도, 무서워도 각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화만 냈다. 엄마가 언제고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긴 이별, 나는 배냇머리가 빠지기도 전에 작별을 준비를 했다. 엄마를 위해 엄마를 놓아주어야 했다. 재작년, 자서전 쓰기 수업을 들으며 그 시절을 복원했다. ‘나’를 알기 위해, 엄마를 썼다. 생각보다 더 무겁고 어두웠다. 엄마는 겨우 몇 마디 이어가다가, “아, 이런 이야기하기 싫다”라며 입을 닫았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지금껏 내 인생은 나를 채워줄 한 사람을 찾는 여정이었다. 부모라는 결핍이 나를 떠돌게 했다. 남편, 목사, 스승에게 완벽을 바랐다. 저마다 어딘가 조금씩 빈약했다. 유명해지고 싶었다. 성공하면 사랑받을 줄 알았다. 기자, 아나운서, 소설가가 되면 해결될 것 같았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자, 나의 모자람을 위장했다. 들킬까 봐 전전긍긍할수록 누추해졌다. 요구하지 않는 사람, 다 알겠다며 웃는 사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지안이는 내가 상실한 ‘나’이다. 요구 많고, 논리적이고, 씩씩한 ‘나’. 나는 아무도 헤치지 않고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렵다. 참고 있다가 엄마와 남편, 두 아이에게 가장 날카로운 돌을 던진다.  인격의 밑바닥을 본 유일한 존재들이다. 지나친 순종과 비판 사이를 오간다. 무작정 참으며 살포시 곁눈질하다가, 매섭게 돌아서기도 한다. 온전히 사랑하고 싶다. 내 모양대로 살아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헤어진 내 안의 아이를 만나야 한다. 아이가 자라지 않는 이상 어떤 애씀도 나를 배반할 것이다. 세월에 빼앗긴 ‘나’, 그 아이 곁에 남겠다.


Photo by Jonathan Borb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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