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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젬마 Dec 28. 2021

일 년 돌아보기

12월.


졸업이 하기 싫어졌다. 혼자 소파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낮술을 마시던 날 든 마음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을 바치고서 나의 빈정을 핑계로 학위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친구들을 만나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하였다. 언니네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던 날은 소주를 꽤 많이 마셨다. 졸업과제에 내년 봄을 저당 잡힌 기분으로 미래는 모르겠고 놀려면 지금 놀아야 한다며 인터내셔널 크리스마스 파티도 아득바득 참가하고 성실맨이랑 둘이 말도 타러 갔다 오고 그랬다. 그래도 나는 사람을 만나면 자꾸만 그 얘기를 했다. R과 트레일을 두 시간이나 걸으면서 서로의 갈 곳을 이야기했다.


11월.


감사하게도 땡스기빙 디너에 초대를 받아 친구네서 터키를 먹고 왔다. 많은 것을 마무리했다. 일정 문제로 필라테스를 그만뒀고 역시나 졸업 인턴십 일정 문제로 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하던 튜터링도 그만뒀다. 졸업까지 남은 것은 인턴십뿐이니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수강인 과목의 마지막 과제도 제출했는데, 파이널이 따로 없이 학기 내내 진행하는 핵심과제 위주인 수업이라 일정상 일이 그렇게 되어 그걸 학기 초에 몰아서 해야 했던 나는 남들보다 일찍 모든 걸 끝내 놓고 일찍 쉬었다. 그러고 나니 피로가 몰려와서 계속 잤다. 병든 닭처럼 계속 졸렸다.


10월.


S네 집에서 소소하게 열린 핼러윈 파티에 갔었는데 그러기까지의 모든 계획이 꼬여 마음이 좋진 않았다. 그래도 할 건 다 해야 한다며 언니랑 펌킨 패치도 갔다. K의 집에서 늦게까지 많은 얘기를 했고 돌아오는 길엔 비가 많이 내렸다. 너무 많이 내렸다. 호우주의보가 있었지만 K의 집에 더 있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고 집에 금방 갈 수 있을 줄 알고 차를 출발했는데 그러면 안됐다. 앞은 하나도 안 보이는데 도로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바퀴가 거의 잠긴 상태로 기어기어 집에 왔다. 중간에 세울만한 곳도 없었고 너무 무서웠다. 사촌동생이 결혼을 했고 그걸 유튜브 생중계로 봤다. 세상 참 좋아졌다면서. 부스터 샷을 맞았는데 2차 때만큼 아프진 않았다. 미열이 있는가 싶더니 아무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일상생활 가능했다.


9월.


엄마 생일이 있었는데 뭘 선물했는지 기억도 안 나네. 9월이 그만큼 힘들었다. 이번 학기에 수강하는 유일한 과목의 제일 큰 과제는 티칭 실습을 하며 1) 수업 및 학교 전반의 맥락 기술 2) 수업 계획 + 수업 계획서 및 모든 수업자료 첨부 3) 수업 내용과 근거 + 수업 동영상 첨부 4) 학생 피드백 + 학생 과제 샘플 및 피드백 샘플 첨부 각각의 파트를 한 학기에 걸쳐 제출을 하는 거였는데... 문제는 같이 수업 듣는 사람들은 현직 교사라서 본인 학교에서 본인 일정에 맞게 과제를 할 수 있었던 데에 반해 국제학생인 나는 배정을 받아 주어진 기간 내에 모든 걸 해야 해서, 남들은 한 학기에 걸쳐 하는 걸 3주 만에 하게 되었네. 게다가 일하게 된 고등학교가 거리가 좀 있어서 가는 데 30분 걸렸고 미국 고등학교 도대체 왜 이렇게 일찍 시작하는 건지 넉넉잡아 6시 반-45분 사이에는 출발을 해야만 제시간에 도착 가능. 거기다 대학원 튜터링 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서 시간을 오후로 조정했는데, 고등학교 끝나고 곧장 학교로 가서 다시 5시까지 튜터링을 하는 일정이었다. 튜터링이라는 게 1대 1 약속 기반이라서 한가할 땐 한가한데 문제는 9월이 국제학생들 중간고사 기간이었던 것. 매일매일 모든 타임 슬롯이 다 차서 한 사람 끝나기도 전에 다른 사람 와서 대기하고 있는 식이라 점심도 못 먹고 일한 적이 수두룩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마지막 출근날 학생들이 써준 카드에는 눈물이 찔끔 났지 뭐야.


8월.


짧은 방학을 맞아 보스턴에 가서 겸사겸사 삼촌을 만나고 왔다. 이맘때 일이 좀 꼬여서 비행기까지 예매해둔 상태에서 정말 돈이 똑 떨어지고 갈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고, 실제로 여행을 가는 게 좀 현실적이지 않은 상황이긴 했다. 운 좋게 뭐 하나가 해결돼서 가게 되긴 했지만 가서도 돈 문제로 꽤 티격태격 싸웠고. 근데 그래도 이런 순간들이 일 년에 한 번은 있어야지 남은 반절을 버티지. 랍스터를 많이 먹고 바다도 많이 보고 또 정말 정말 많이 걸었다. 앨라배마 사람에게 이런 도보여행.. 이제 무리야... 5분 거리도 차로 가게 해줘 제발... 다녀오자마자 언니가 한국으로 영영 돌아가서 다른 언니랑 둘이서 애틀랜타 공항까지 데려다주고 셋 다 뿌앵 울었음.


7월.


내 생일을 포함, 여러 사람의 생일이 있었고 꽤나 뻑적지근한 파티를 한 다음 생일이 같아 동반 생일자였던 언니랑 둘이 다시는 이런 걸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브레이크를 잡을 때마다 소리가 너무 심해져서 차를 수리 맡겼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비용이 너무너무 많이 나오는 바람에... 우리 보스턴 못 가는 건가 싶었고... 이때는 튜터링 센터에서 일하기 전에 아직 대학원 부속 영어 프로그램에서 영어 티칭 봉사를 하고 있을 때라 매주 수업이 있었다. 코 티쳐가 2명이라 나 포함하여 선생이 3명인 것도 재밌었고 협업에 관해서라면 항상 배우는 게 많지. 레벨 2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재밌었음.


6월.


또 다른 실습이 있었다. 봄학기에 나간 곳은 초등학교. 아니 근데 배정받을 때 분명 1학년 반이라고 했잖아요, 유치원 다니다가 올 9월부터 1학년 입학하는 예비 초등학생이라곤 안 했잖아요... 아직 초등학교 시스템을 안 겪어본 유치원 졸업반들은 수업 시간에 앉아있어야 하는지, 선생님이 얘기할 땐 조용히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에요... 등교하면 애들 아침부터 먹이는데 줄 세워서 배식받아다가 교실로 올라와서 애들을 다시 앉힌 다음 6세들은 포크 하나 요플레 하나 혼자서 포장을 깔 수가 없기 때문에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모든 포장을 다 벗겨주고 마지막 포장을 벗길 때쯤이면 제일 처음 먹기 시작한 애가 다 먹었다고 나를 부르므로 다시 돌아가서 잔반을 치우고... 이걸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하면 내 점심 따위는 먹을 시간이 없어서 그냥 두 시까지 굶고 집에 와서 먹는 걸 택했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음. 그만큼 사랑으로 절여지고 왔거든.


5월.


5월엔 정말 이렇다 할 이벤트가 없었다. 달력을 봐도 전부 과제 제출일과 미팅들 뿐이야. 그래도 보니 5월까지는 스페인어 과외를 하고 있었나 보다. 가르쳐주던 친구가 풀타임 잡이 생겨서 더 이상 과외를 못하게 되었고 나의 스페인어는 진보 없는 퇴보뿐이야...


4월.


4월도 계속 과제로 바빴고 뭐라고 기억할만한 건 S의 생일파티뿐. 라푼젤 테마 파티였는데 너무너무 귀여웠더라며 언니랑 나랑 두고두고 회자하곤 했지... 다 큰 사람들 모여서 이스터 에그 색칠하고 케이크 먹고 디즈니 플러스로 라푼젤 애니메이션 보기... 쏘 큐트... 봄학기에는 레벨 5반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 같다. 매주 수업과 미팅 기록이 있네.


3월.


백신을 맞았고 이틀을 꼬박 앓았다. 터스컬루사에 친구 추억여행을 갔다 왔고 친구들이랑 영화 미나리를 보기도 했다. 세탁기를 샀다. 미국 와서 처음 살았던 집에서는 한동안 세탁기 없이 코인 세탁소 이용하다가 이후에는 아파트에서 렌트해서 살았었고, 이번에 이사 오면서 처음으로 내 걸 샀으니까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한 번 정도 같은 단지 살던 언니네서 빨래를 하는 신세를 졌던 것 같고 그 뒤에 곧바로 세탁기 배송이 왔었네. 설치하는 동안 고양이들을 방에 넣어놨었는데 어쩌다가 실수로 슈가가 나와서 낯선 사람들에 너무 놀란 나머지 열린 현관문으로 뛰어나갈 뻔해서 심장도 같이 뛰어나갈 뻔.


2월.


2월 28일에 이사를 했다. 여기 오피스는 처음부터 별로고 아직도 별로지만 그 외의 다른 모든 것 (위치 및 접근성, 가격, 크기, 주변에 친구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계약. 근데 분명 우리가 집 보러 왔을 때에는 코로나 때문에 투어 안된다고 했으면서 그게 고작 1-2주 전인데 계약하고 키 받으러 올 때 어떤 미국인 가족 친절하게 투어 시켜주고 있던 우리 담당자를 보아버렸고 다른 여러 불쾌한 일들이 겹쳐서 님은 제 마음속에서 아웃되셨습니다...


1월.


이렇게까지 달력에 아무 기록이 없을 수 있나. 봉사하던 영어 프로그램 미팅과 하고 있던 과외 일정뿐이다.



분명히 친구들하고 라스베이거스에 갔다 온 게 올해 여름 같은데 달력을 보니 도대체 이 빡빡한 일정 사이에 언제 거기에 다녀온 것인지 알 수가 없음. 몇 박 며칠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고 여행 일정은 기록에 없고 달력엔 단 하루도 뭐가 비어있는 칸이 없는데 여행을 갔었던 건 나의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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