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미국인데?
때를 챙겨가며 살아야 한다. 시간을 마디로 나누어 기념하지 않으면 눈 깜짝하는 사이에 이듬해에 와있곤 했다. 그렇게 떠밀려오듯 맞이하는 새해란 사람을 머쓱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내가 뭘 했다고 벌써 모든 게 지나버렸지 하고 뒷머리만 긁게 되는 것이다. 즐거운 일은 찾으면서 살아야 한다. 즐거운 일에 무덤덤해지는 게 쿨한 어른이라고 생각하여 "생일이 뭐 대수인가" 하고 냉소를 날리던 어느 날 생각했다. 내가 나서서 즐겁지 않으면 인생에는 더 이상 저절로 찾아오는 즐거움이 없을 수도 있겠다고. 어른이 되다가 가족들은 멀리 있고 친구들은 흩어지던 길목이었다.
그때부터 때마다 즐거운 일을 찾아 나서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봄이 오면 대청소를 하고 여름이 오면 수영을 하고 가을이 오면 산책을 하고 겨울이 오면 스키장에라도 가고 싶지만 나는 눈 따위 내리지 않는 앨라배마에 살고 있으므로 벽난로에 장작을 땐다. 한국 명절에는 한국인 친구들을 불러 밥을 먹고 미국 명절에는 터키를 먹든 크리스마스트리를 놓든 뭐라도 어울리는 걸 한다. 생일이 되면 파티원을 모집하고 밥때마다 맛있는 걸 먹도록 한다. 찾아오는 모든 때에 여건이 되는 한에서 뭐라도 한다. 그런 결심으로 부지런하게 즐거워하고 있다.
올 연말은 그 여건이 영 되지를 않았다. 친구들은 사정이 있었고 나도 사정이 있었다. 성실맨은 어김없이 신정에도 출근이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파티에 대비해 집을 꾸미지도 않았고 예쁜 옷을 차려입지도 않았고 샴페인을 사러 가거나 음식을 만들지도 않았다. 맛있는 걸 먹으면서 영화라도 보기로 했지만 그거야말로 저녁마다 하는 일이다. 멀쩡한 식탁 놔두고 테레비 앞에 조그마한 상을 펴놓고 파자마 차림으로 밥을 먹으면서 테레비를 보는 것. 꼬질꼬질한 오늘이 어제와 하나라도 다르려면 나에겐 한 가지가 필요했다. 카운트다운. 일 년에 딱 한 번 하는 카운트다운. 5! 4! 3! 2! 1! 해피 뉴 이어! 와 함께 터지는 폭죽을 화면 너머로 보면서 옆사람에게 새해 인사를 건네는 일. 그럼 최소한 이런 날 아무것도 안 한 게 되지는 않으니까.
성실맨은 뉴욕 타임스퀘어 생중계를 틀었다. 한국에서는 타종행사를 올해도 온라인으로 했다던데, 마스크도 안 쓴 사람들이 입김을 뿜으며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그걸 보다 보니까 졸렸다. 이따 깨워준다는 말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깬 것은 2022년이었다. 성실맨이 "지수야, 지금 2022년이야!"하고 나를 깨우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아 "카운트다운은?"하고 물었다.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뉴욕은 우리랑 시간대가 달라서 먼저 해버렸더라고."
"아니, 뉴욕 말고 우리 지역 티브이가 있잖아. 작년에도 내쉬빌에서 했잖아."
"그 생각을 못했네...?"
말도 안 돼, 하면서 돌아누웠다. 앨라배마 시계를 보면서 뉴욕 카운트다운을 기다리는 바보가 어디 있어. 2022년은 시작부터 망한 거야. 그걸 말로 하고 나니까 진짜로 망한 것 같았다. 요 근래 망해가고 있던 모든 일들이 새해를 시작으로 폭삭 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원래 눈물이 많으므로 이번에도 어김없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성실맨 앞에서는 더욱 취약해지곤 하기 때문에 점점 더 크게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깨워준대놓고 안 깨워준 주제에 앞뒤 없이 무조건 다 괜찮다는 거짓말쟁이에게 "하나도 안 괜찮아! 일 년에 한 번이잖아! 오늘 놓치면 이제 일 년 기다려야 되잖아!"하고 일갈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거짓말쟁이는 급하게 핸드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수야, 지수야, 지구는 둥그니까 아직 다른 데에서는 새해가 안 왔어. 우리 다음 카운트다운을 하자."
"... 그래?"
그렇게 우리는 캐나다 방송을 틀어놓고 다시 앉았다.
"저긴 미국도 아니잖아..."
"근데 LA 거 보려면 두 시간 기다려야 돼. 내일 출근은 해야지..."
"캐나다 새해를 우리가 봐서 뭐하는데... 캐나다엔 가보지도 않았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어쨌든 지구 어딘가에서는 새해잖아. 그냥 좀 봐."
캐나다는 정말 정말 정말 추운 모양이었다. 모르는 음악가들이 나와서 순서대로 공연을 했는데, 저렇게 눈이 쌓인 날씨에 야외에서 악기를 연주하게 하다니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무대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눈 덮인 산에서 머리도 수염도 금발인 남자가 손 끝만 드러나는 장갑을 끼고 기타를 치고 있었다. 추워서 땡땡 언 손끝이 기타 줄에 닿을 때마다 내 손이 다 아렸다. 그다음에는 다른 남자가 다른 장소에서 피아노를 쳤는데 역시나 칼바람이 부는 야외였고 그는 맨손이었다. 곡이 진행될수록 그의 코도 점점 빨개졌다. 저렇게 얼어붙은 손으로 틀리지 않고 건반을 누르려면 피아노를 정말 정말 잘 쳐야 할 것 같았다. 그걸 보는 우리는 갑자기 26-7도까지 올라가는 실내 기온에 겨드랑이가 후끈해져 에어컨을 튼 참이었다. 테레비에서는 눈에 보라색 글리터를 어마어마하게 올린 여자가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당신은 슈퍼스타라는 노래를 부르다가 카메라를 멋들어지게 쳐다보며 "캐나다!! 당신은 슈퍼스타!!" 하며 호응을 유도했다. 캐나다에는 가본 적도 없는 한국인 둘이 미국에서 그걸 보고 있었다.
11시 59분까지 이어진 누군가의 노래를 끝으로 화면이 전환됐다. 숫자를 하나씩 외칠 때마다 카메라는 다른 사람들을 비췄다. 새해 첫날부터 눈물을 뽑게 만든 중요한 10초를 우리는 캐나다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털모자에 추워서 볼이 빨개진 캐나다 사람들이 9! 하면 반팔에 반 바지를 입고 에어컨 바람을 쐬던 우리도 9! 했다. 8!
7!
6!
5!
4!
3!
2!
1!
해피 뉴 이어! 해가 바뀐다고 물리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시간이란 관념일 뿐이므로 막상 해피 뉴 이어를 외치자 조금 허무해졌는데 아마 내일이면 이 허무함 정도는 어김없이 미화될 것이었다. 작년에 즐거웠던 많은 일들이 그 당시에는 이게 전부인가 싶고 조금 허무했는데 지금은 이미 미화되어서 세상에 둘도 없는 추억인양 기억하는 것처럼 이번 카운트다운도 그럴 것이다. 누가 2022년 새해에 뭘 했냐고 묻거든 캐나다 사람들과 카운트다운을 했다고 말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