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초등5학년부터 중3까지 화실을 다니며 미술레슨을 받았다.
자그마치 5년 동안 홍대미대를 졸업하신 분들께 사사를 받으며 차근차근 서울예고에 진학할 준비를 마쳐가던 참이었다.
입시를 불과 몇달 앞두고 갑자기 나와 아내에게 상의할 것이 있다며 예고를 안가겠다고 했다.
5년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그 아이가 얼마나 열심히 전심을 다해서 준비를 했는지 알기에 우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유를 묻는 우리에게 딸애는 그렇게 대답했다.
"더이상 똑같은 그림을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시간내에 기계처럼 그리는 것을 하고 싶지 않아요"
5년의 시간을 한순간에 엎어버리고 다시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가기 위해 방향을 트는 그 결단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이에게는 한번 더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그 결심이 변함이 없음을 들었을 때에는 전폭적으로 다음 길을 지지했다.
인생은 길다. 3년쯤 돌아가도 큰일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대로 그 3년의 돌아감은 오히려 딸이나 우리에게 좋은 시간이 되었다. 무작정 좋은 시간이었다고 정신승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결과를 딸아이는 만들어갔다.
그래서 딸을 키우면서 배웠던 것들을 적어볼까 한다.
1. 나도 중학교때 미술반에서 그림을 배우던 전도 유망한 미술학도 지망생이었다. 당시 학교를 대표해서 전국 중학생 미술대회에 나가 입상을 했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입상한 그림은 얼마후에 전시되었고 난 그 그림을 보며 깜짝 놀랐다. 숲 풍경을 그린 것이었는데 떨어져서 보면 영락없는 나무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내가 저렇게 잘 그렸나 하고 놀란 것이다. 하지만, 내 그림은 늘 그런 식이었다. 대상을 보고 얼마나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는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딸아이는 당시의 나보다 훨씬 더 수준높은 실력을 가졌음에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다.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십대 소녀의 도전의식이었다.
2. 십대 소녀의 진정성있는 설득. 그만 두겠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만두고서 어디로 진학할지 무엇을 할지 나름의 계획을 다 세워서 부모에게 미팅을 요청했다. 그 계획을 들으며 우리는 검증을 해보기로 하고 관련된 분들을 다 만났다. 그리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딸의 계획이 무모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위험하거나 나태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됐고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를 진정성을 가지고 설득한 딸이 너무나 대견했다.
3. 새로운 계획을 실행한 후 딸은 열심히 살았다. 다른 평범한 친구들과 같은 보장된 길이 아니었기에 틈틈이 공부해서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갔다. 선택을 본인이 했기에 그에 따른 책임도 스스로 지려고 최선을 다한 딸을 보며 주도성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처럼 주도성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4. 서른이 넘은 딸이 지금은 일에서도 어느 정도 정착을 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러기까지 다양한 시도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많은 시도를 통해 딸은 자신을 알아가는 소중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하나의 길을 가는 것이 더 안전할 수도 있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자칫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두려움도 있을 수 있다. 내 딸이라고해서 왜 안그랬을까? 그 마음을 난 충분히 짐작한다. 정착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두려운 마음.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을 잘 건넜다. 당시에는 힘들지만 건너고 나면 그 경험은 너무나 소중한 자산이 된다.
난 지금도 내가 좋은 아빠였는지 생각해볼 때마다 그렇지 않았음이 부끄럽고 미안할 때가 많다. 하지만, 한가지 만은 놓치지 않고 지켰다.
"너희의 삶이다. 너희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도 스스로 지는 것이다. 아빠로서 지지와 응원은 하지만 간섭은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가 책에서("나도 나를 믿지 못했다", "가우스전자 리더십편") 말하는 리더육성의 원칙은 공허한 말이 아니다. 누구든 나와 함께한 팔로워는 스스로 주도적이 되기를 기대하며 자주 그것을 요구한다. 그것만이 흔들리지 않고 굳은 심지로 제대로 서는 리더의 비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난 모두가 주인이 되어 주도적으로 살기를 온 마음으로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