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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떠나 Apr 20. 2021

순백의 태백

태백산은 겨울이 제철이다



 알람이 울렸다. 채 두 번째 알람음이 울리기 전 눈을 떴다. 5시 21분. 밖은 아직 어두웠다. 해보다 부지런히 움직인 게 얼마만일까. 오랜만에 가벼운 몸으로 양치와 세수, 머리감기를 마쳤다. 어제 눈이 왔으니 오늘 강원도 날씨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베이스 레이어를 두 개 겹쳐 입었다. 땀에 젖지 않는 기능성 긴팔티 두장 위에 경량 패딩을 입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구입한 겨울 옷들이었다. 첫 시착을 태백산행을 위해 하다니 왠지 모르게 영광스러운 기분이었다. 하의도 두 겹을 겹쳐 입었다. 드라이핏 레깅스와 조거 팬츠를 겹쳐 입었다. 마무리는 플리스 소재의 자켓이다. 이렇게 입어도 추울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너무 더운 것보다는 살짝 추운 게 낫지 않을까. 온전히 직감에 오늘 하루를 걸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걸 보니 직감이 잘 맞을 것 같았다. 아이젠, 등산 스틱, 무릎 보호대 등등 뜻밖의 위험요소에 대비해 할 수 있는 모든 안전 장비를 챙겼다. 6시 20분. 집을 나섰다.


 석계역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 친구들과 함께하는 등산이라 마음이 편했다. 태백산 국립공원까지 3시간 남짓을 달렸다. 가는 내내 들리는 노래 한곡 한곡이 신났다. 가사가 귓가에 쏙쏙 들어와 꽂혔다.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며 함께 웃었고, 피곤하지 않았고, 행복하단 말을 30분에 한 번씩 입 밖으로 냈다.


 경기도 광주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500ml짜리 물을 6개 더 사고, 초콜릿과 쿠키, 젤리를 샀다. 정상에서 먹을 간식거리이다. 푸드코트에서 아침을 먹었다. 원래 아침을 잘 먹는 편이 아니지만 미리 먹어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휴게소는 역시 국민 맛집이 맞나 보다. 기대 없이 시켰던 묵은지 비지찌개는 간도 딱 맞고, 든든하며 뜨끈했다. 시작이 좋다. 창 밖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좋다. 눈송이는 진눈깨비에서 함박눈으로 금세 몸집을 키웠다. 눈송이가 커질수록 오히려 정상에 닿겠다는 도전 의식도 커졌다. 그래, 오늘은 설산을 보러 떠나는 여행이다. 마침 눈까지 오니 설산 한 번 원 없이 즐기다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태백시에 도착했다. 가는 동안 커졌다 작아졌다 막 태어난 새끼 새처럼 비틀거리던 눈은 어느새 안정적인 모습으로 바람을 타고 힘차게 날고 있었다. 국립공원 가까이에 있는 전망대에 잠시 차를 세웠다. 듬직한 태백산이 눈 앞의 모든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앞으로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언 강 위로 눈이 쌓여, 군데군데 뚫린 얼음으로 강의 흔적을 찾을 뿐이었다. 왼쪽 멀리 작은 마을이 보였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올 법한 초가집을 상상하게 하는 분위기였다. 포근하고 조용했다.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면 주인은 그 안에서 고구마를 굽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고즈넉한 오전의 강원도. 자꾸만 행복하단 말이 터져 나왔다.


고즈넉한 오전의 강원도 산골 풍경. 마음까지 포근해지는 풍경이다.


 내비게이션 목적지인 유일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미 제1,2 주차장은 만차였다. 바람이 아주 강했고, 눈보라가 매서웠다. 등산하기 좋은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태백산을 찾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국립공원 관리인은 오후에 날이 갤 수도 있으니 천천히 올라가면 정상에 닿을 수 있을 거라 말했다. 폭설로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가 보다. 그저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내려오는 게 그날 우리의 목표였다.


 난생처음 아이젠을 장착했다. 착용이 쉬워 다행이다. 눈 위를 걷는 내내 안정감이 느껴져 아주 마음에 들었다. 등산스틱을 챙겨간 게 무색할 정도로 눈 쌓인 바닥으로부터 내 몸을 잘 잡아주었다. 무적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태백산은 야수와 같았다.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이 주는 위엄 때문이었을까. 거대하고 사나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는 정반대였다. 너무나 친근하고 순한 산길은 어른들이 아이를 데리고 올 수 있을 정도로 어렵지 않았다. 그저 쌓인 눈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금만 조심하면 될 터였다. 눈 오는 날이 이 정도였으니 날씨가 맑은 날은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초반에 가파른 경사를 조금 오르고 나면 길이 좁아진다. 그런 와중에 시원하게 뻗은 나무 숲길이 나온다.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소복한 눈이 내려온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봤던 낭만이 태백산에 있었다. 눈은 하염없이 내렸으나 서울의 눈과는 달랐다. 서울의 눈은 습하고 맑은 맛이 없다. 하지만 태백의 눈은 순박하고 청정했다. 머리와 가방 위에 쌓이긴 했지만 질척이는 법이 없다. 툭툭 털면 터는 대로 떨어지는 착하고 기분 좋은 눈이었다. 그래서 눈을 맞는 일이 참 행복했다. 좁은 길로 들어가니 바람도 잦아들어 오를수록 산과 친해지는 느낌이었다.



 눈꽃은 가히 절정이었다. 정상을 1킬로쯤 남기자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폭이 1m쯤 되는 등산로를 제외한 양 옆의 숲이 그랬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꼬옥 꼬옥 밟았다. 축복이다. 거대한 주목 위에도 눈이 쌓였다. 오래된 만큼 몸집이 큰 나무들도 뽀얗게 화장을 했다. 아름다웠다. 잠시 살았던 캐나다 로키산맥의 작은 마을 자꾸 생각했다. 산 전체가 함박눈으로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났다.


 정상에 더 가까워지자 나무들의 키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삼엄한 바람 때문이었으리라. 허리춤까지 오는 나무들은 이파리 없이 가지만으로 바람을 견디고 있었는데, 가지 하나하나 위에 눈이 쌓이자 마치 산호 같았다. 산 위에 핀 하얀 산호였다. 가는 걸음걸음마다 아름다운 자연의 연속이었다.


산 위에서 볼 수 있는 산호. 겨울에만 볼 수 있다


 정상인 천제단에 도착했다. 바람이 심했다. 성인 남자가 휘청거릴 정도로 바람이 셌다. 눈보라가 섞인 바람이었다. 선글라스나 모자가 없으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동안 춥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정상에 도착하자 발끝과 손끝이 아려왔다. 고통이 느껴지는 추위였다. 태백산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었다. 천제단에 들러 기도를 드렸다. 너무 추워서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친구의 속눈썹은 이미 얼어 있었다). 바로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1킬로쯤 내려오자 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포근하고 온순한 태백으로 돌아왔다. 눈구름이 물러가고 해가 뜨기 시작했다. 기상 예보보다 해가 늦게 뜬 것이다. 가을의 그것처럼 청명한 하늘이 얼굴을 드러냈다. 해는 따뜻하고 하얀 눈에선 빛이 났다. 산은 하얗다 못해 반짝이기까지 했다. 황홀했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어린 여자아이들이 비료포대로 썰매를 타고 있었다. 순백의 태백과 잘 어울리는 순수함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엔 우리도 비료포대를 챙겨 오자! 친구들과 농담 반 진담 반 아쉬움을 남기며 산을 내려왔다.


 설산은 처음이었다. 겨울은 등산이 어려운 계절이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180도 바꿔준 게 태백산이었다. 전혀 위험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줄 뿐이었다. 4개월 동안 일에 절어 감성과 낭만을 잊었던 내게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도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역시 산은 위로가 된다. 순백의 태백에 감사했다. 행복하다 말했지만 행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완벽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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