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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Jun 15. 2021

몸이 부르는 그곳

혹은 몸을 부르는,

나는 기차역을 좋아한다. 기차역 부근에 도착하면 홀로 또는 누군가와 함께 짐을 들고 한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좋아하고, 그들과 함께 뒤섞여 같은 곳을 걸어가는 나를 좋아하기도 한다. 기차역에 들어서면 풍기는 특유의 냄새와 기운, 바쁘게 기차를 타러 가는 사람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기차역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에서 각종 뉴스를 구경하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 등을 빠르게 또는 느리게 관찰하는 것도 좋아한다. 코로나19가 찾아오기 전, 기차역에서 간단히 먹을 것을 사서 지정된 좌석에 앉아 식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거나 약간 비싸다고 느끼는 음료 등을 구매할 때도 종종 있었다. 기차를 타는 행위는 특별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갖추고 싶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기차역으로 향하는 이유는 집으로 가는 것인데도 말이다.      


태어나서 약 20년 동안 살았던 곳, 부모님이 계신 곳이 부산이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나는 언제나 기차였다. 기차가 가장 저렴하지도, 가장 빠르지도 않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기차였다. 그러다 보니 기차역으로 가는 길이 부산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산에 도착해 가장 먼저 두 발을 내딛는 곳도 부산역이다. 아침이든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기차에서 내려 들이마시는 첫 숨을 좋아한다. 언제 도착하든지 그 첫 숨은 약간의 설렘과 깊은 안도감, 그리고 따듯함을 준다. 참 신기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왜 부산과 서울의 공기가 이토록 다른지 말이다.   

   

2021년, 올해 나와 약속한 것 중 하나가 한 달에 한번 부산에 가는 것이다. 지난해 몸이 아파 힘들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많은 어려운 일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아직 내 옆에 두 분이 있다는 것이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특별하지 않더라도 자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다 싶었다. 그저 방에 누워 늘어지게 잠을 자더라도 그냥 그 자리가 부모님 옆이었으면 했다. 일을 시작하면서 적어도 두세 달에 한 번은 집에 가려고 노력했는데 어쩌다 바쁘거나 일이 생기면 뒤로 미루기 일쑤였다. 하지만 올해는 부산에 가는 일정을 먼저 잡고, 부모님과 상의한다.  

    

부산에 가면 대부분 동네를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 아버지와 외식을 하러 근처 대학가를 가거나 어머니와 쇼핑을 하러 시내로 가는 경우를 제외하곤, 동네 빵집에서 빵을 사고 집 앞 시장에서 함께 장을 보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한다. 어느 날 아버지는 온종일 집에만 있는 나에게 부산에서 만날 친구가 없냐며 왜 집에만 있냐고 물었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서울에 있다고 에둘러 말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이제는 삶의 환경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고 연락이 닿지 않은 경우가 늘어났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냥 집에 머물고, 부모님과 동네를 산책하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충분했다. 아, 바다는 꼭 봐야 한다. 바닷가를 거닐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조금 머물며 바라만 보아도 충분하다.   

   

언젠가 지인에게 부산은 ‘동굴’과도 같다고 말했다. 안전하고 포근한 동굴에서 며칠 있다 보면 뾰족하게 솟아있던 몸과 마음이 많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진다고, 그래서 나는 부산으로 가야 한다고. 몇 년 전 부산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고 나서 며칠 전부터 집중이 잘 안되고 가는 날만 기다리던 나를 발견하고선 알았다. 아 부산에 가야 하는구나, 내 몸이 원하고 있구나, 하고.

     

올해 초 마음이 복잡한 일이 여러 겹으로 쌓여 찾아온 순간이 있었다.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하지 않나. 그러던 어느 주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부산역에 도착해 늘 그렇듯이 항구를 바라보고 크게 숨을 한번 뱉었다. 평소에도 항구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놀랍게도 색색의 컨테이너 화물과 정차해 있는 배, 관련 시설 장비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풍경은 뭔지 모를 안도감을 가져다준다. 그날도 그랬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와, 그와 대비되어 강한 색을 내뿜는 항구를 보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더라. 그리고 주말을 잘 보내고 서울로 다시 올라가는데 감당하기 벅차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괜찮게 느껴졌다. 상황이 나아지거나 달라진 것도 아닌데, 고민에 대해 누군가와 상의하거나 해답을 얻은 것도 아닌데, 감당할 수 있을법한 무언가가 되었다.     


부산이 그리도 좋으면 부산에서 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던 지인에게, 그래서 나는 부산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부산에서 살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들을 느끼지 못할까 봐, 고마움을 가지지 못할까 봐, 그리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어딘가를 남겨두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그렇다.   

   

헐벗고 얄팍한 마음을 채워주는 곳, 나사못처럼 툭 튀어나온 감정을 무르게 문질러 주는 곳, 너덜너덜해진 기운을 다독이고 잘 수선할 수 있는 곳, 이런 곳이 꼭 누군가의 고향일까? 그건 아니었다. 부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지인은 예전에 자주 여행을 가던 특정 지역이 그렇다고 얘기해주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 역시 잠시 살았던 덴마크 코펜하겐이 떠올랐다. 물가가 높은 곳이라 정말 알뜰하게 지내는데 온 감각을 집중했던 기억만이 가득하고, 겨울에는 오후 세시면 해가 지는 곳이라 머무를 때는 특별히 정겹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곳이 그렇게 그리웠다. 몇 년 전 여행으로 다시 갔을 때, 예전 살던 곳 근처 역에 도착하자 부산역에서처럼 따뜻한 첫 숨을 느낄 수 있었다. 춥고 비가 오는 한겨울의 밤이었음에도 말이다. 짧게 머물렀던 며칠 동안 나는 회복되고 있음을 몸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물론, 함께 살았던 친구가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어서 더욱 그랬겠지만.   

     

며칠 전 친구에게 ‘몸이 부산을 불러.’라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이 마음에 대해 쓰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졌다. 꼭 나처럼 온몸이 부르는 곳이 어떤 특정 장소가 아니더라도, 혹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나 어떤 존재여도 좋겠다. 마주하면 설레고 안도감을 주는, 그래서 움츠린 몸과 마음을 다시 펼 수 있도록 도닥여 주는 그런.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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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lang Ylang "Fkj"

지난 글에서 한번 소개한 적 있는 음악인데요, 이 음악 역시 저를 다독여주어서 한번 더 소개합니다.

라이브 세션으로 들어도 참 좋아요! 아름다운 집에서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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