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백신 접종 이후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몇 시지, 하고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는데 새벽 2시 58분. 갑자기 주변이 더 어둡고 고요하게 느껴졌다. 하아, 이 시간에 깨면 안 되는데. 다시 잠에 들기 위해 명상 앱을 틀고 눈을 꼭 감았다. 제발 잠을 자자, 잠을 자. 하지만 잠을 자야 한다는 주문은 영 신통치 않다. 새벽 세 시에 깨면 거의 대부분 잠과 꿈의 경계를 허우적대느라 머릿속은 바빠지고, 나는 일어나야 하는지 아니면 잠을 계속 청해야 하는지 마음과 대화하느라 속절없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새벽 6시가 좀 넘어서야 눈을 뜬다. 왠지 오늘도 뭔가에 졌다 싶은 마음으로.
8월 30일. 백신 1차 접종을 마쳤다. 어머니 아버지도 염려할 만한 이상 반응이 없었고 주변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접종 부위가 뻐근하거나 통증이 있다는 어려움 외에, 일주일 정도 무기력해진다는 증상 이외에 특별한 징후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백신을 맞고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지는 경우를 뉴스로 접하면서 두렵기도 했지만 사람마다 몸의 상태가 천차만별이고 백신에 반응하는 형태도 다르니 은연중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백신 접종 후 몸 상태를 걱정하는 친구에게 으름장을 놓았겠지. 나는 아픈 몸이니까 내가 괜찮으면 너도 괜찮을 거라고. 내가 매일매일 상세히 보고해주겠다고.
백신 접종을 하고 난 당일은 괜찮았다. 심장이 빨리 뛸 때도 있었지만 가슴이 답답하다거나 통증이 있지는 않았다. 두통이나 팔의 통증 역시 이틀 후에 모두 사라졌는데 몸의 다른 곳에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당시 생리 중이었는데 생리양이 급격히 증가했고 수면이 불안정해졌으며 식욕이 사라졌고 무기력해졌다. 더 큰 문제가 없는 것은 무척 다행이었지만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징후 때문에 놀랐고, 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반응이 예전에 복용하던 약 부작용과 비슷해 무서웠다. 혹시라도 백신을 접종한 후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지거나 몸에 스트레스가 높아 기저질환의 정도가 더 심해진 건 아닐지 염려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그 말이 몸과 마음을 관통하지는 못했다. 분명 이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것임을 알았고,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치 끝나지 않거나 또는 더 나쁜 결과로 가고 있을까 봐 두려웠다.
일주일 뒤 다시 병원을 찾아 검진을 하고 수액을 맞았다. 수면제와 위장약을 처방받았다. 약의 도움을 받아 잠도 잘 자고 싶었고 다시 식욕을 회복하고 소화가 잘 되길 바랐다. 빠르게 몸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뒤 정도에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밥을 지었으며 무언가를 보고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욕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새벽 세 시면 잠에서 깬다는 것이다. 수면제를 먹어도 마찬가지고 수면제를 먹지 않았을 때도 그즈음이면 항상 눈이 떠졌다. 마치 그 시간에 눈을 뜨면 안 될 것처럼 나는 번쩍, 하고 잠에서 깼다. 어둡고 어두운 시간에.
질병과 돌봄, 노년에 대한 서사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꿰어낸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왜 몸의 이야기가 새벽 세 시라는 특정한 시간과 만나는 걸까 또렷하게 알기 어려웠다. 아픈 몸이긴 하지만 한번 잠들면 웬만해선 잘 깨지 않는 나에게 새벽 세 시는 조금 낯선 시간이었다. 물론 아프거나 생각이 많아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어도 새벽 세 시는 그저 지나가는 시간에 불과했다. 왜 많은 시간 중에 새벽 세 시의 몸들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새벽 세 시’는 이 변화들이 가장 날카롭게 지각되는 시간이다. 통증의 들쑤심에 속절없이 지새우는 밤의 새벽 세 시를, 쏟아지는 잠을 떨치며 지친 몸으로 아픈 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새벽 세 시를, 나이 들어가며 ‘전 같지 않은’ 몸을 마주하게 되는 새벽 세 시를 떠올려 보라. 가장 아끼는 음악의 축복 속에서 몽상의 글귀를 암송하고 사유의 문장들에 공명하며, 그렇게 자기만의 우주를 누리던 저 숱한 새벽 세 시의 시간들은 이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몸이 우리를 데려가는 시간으로 바뀐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12쪽)
그러다 문득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잠들지 못하던 밤을 떠올렸다. 수술 당일 통증을 잊고 싶어 너무나 간절히 잠을 원했지만, 내 몸에 수시로 들어오던 스테로이드는 온몸을 깨웠다. 참고 또 참다가 안 되겠다 싶어 병실에서 나와 간호사 실로 향했던 그때, 시간은 새벽 세 시를 지나고 있었다. 깊이 잠들어 버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밤, 그러나 아침을 맞이하기엔 아직은 너무 이른 시각. 나는 세 시를 기점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수면제를 요청하러 나갔다.
검진을 위해 방문한 동네 병원에서 약한 수준의 수면제를 처방해주었다. 수면제의 효력이 3시간 정도 지속되는지 여전히 새벽 세 시 언저리에서 잠이 깬다. 처음에는 잠을 푹 자지 못하는 것에 대한 속상함이 컸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니 ‘새벽 세 시’라는 시간이 새롭게 다가왔다.
새벽 세 시. 밤이 깊고 깊어진 시간.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아직 어둡고 고요한 시간. 깨어 있기에도 다시 잠들기에도 애매해져 버린 시간. 어느 새벽 세 시, 나는 바로 잠들기를 포기하고 이 시간에 대해 생각하며 나와 함께 깨어 있는 사람들의 새벽 세 시를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보았다. 어떤 사람들일까, 이 시간에 깨어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순간이 어떨까.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여전히 새벽 세 시 언저리에 잠을 깬다. 평소 잘 꾸지 않는 요란한 꿈도 꾼다. 나는 꿈꾸지 않는 칠흑같이 깜깜한 나의 수면 시간을 사랑하기에, 깊은 잠이 조금씩이라도 돌아오길 바란다. 만약 깊게 잠들지 못하는 새벽 세 시가 지속된다면 다시 병원에 방문할 것이고, 코로나19 부작용에 대한 검진도 받아야 하지 않나 싶다(이상반응이 일어난 일주일 뒤 자가진단을 해보았는데, 괜찮다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새벽 세 시는 다른 시간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거나 끝맺는 시간일 수도 있다. 일례로 종이신문은 아침 동이 틀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새벽 세 시처럼 아주 깊은 시간에 배달이 된다. 종이신문을 구독하면서 알게 됐다. 아니면 누군가에게는 그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깼다가 다시 잠을 청하는 일상적인 시간일 수도 있다.
백신 접종을 한 후 예측할 수 없는 몸의 반응을 견디기 어려웠을 때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숨을 한차례 돌릴 수 있는 지금에서야 새벽 세 시를 생각해보게 된다. 여전히 나에게는 어둡고 고요해 적막한 시간, 새벽 세 시를 견디고 살아내고 있을, 또는 살아가고 있을, 지나고 있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시간을 조용히 응원해 보았다.
가장 아끼는 음악의 축복 속에서 몽상의 글귀를 암송하고 사유의 문장들에 공명하며, 그렇게 자기만의 우주를 누리던 저 숱한 새벽 세 시의 시간들은 이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몸이 우리를 데려가는 시간으로 바뀐다.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Wanderlust _ Elo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