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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글 Mar 08. 2023

연민의 메커니즘에 대한 단상 (1)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 더 잘 알아보는 법

최근 내 세계가 퍽 얄팍하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없었던 사람들의 행동이 뒤늦게야 조금씩 이해가 되곤 한다. 그 당시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모질게 반응하면서 이미 상처가 나 쓰라린 곳을 더욱 아프게 하는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J가 나에게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본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다. 그 문장이 나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아직 감사히도 삶에 큰 굴곡은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만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해가 지나면서 조금 더 깊은 눈을 가진 나는 이전보다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다. 힘들어하는 사람 앞에서 상식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설교를 늘어놓거나 답답해할 것이 아니라 잔잔히 상대의 말을 듣고 그 상황에 공감해 보려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싶어 진다.


연민에 대한 나의 감정은 꽤나 복합적이다. 그래서 그것을 해부해서 완벽하게 분석하는 대신, 연민이라는 감정과 그 감정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었던 사건들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3년 정도 된 것 같다. A는 본인이 서른 살까지 되고 싶은 모습이 있었는데, 서른 살이 된 지금 자기가 꿈꾸던 모습과의 괴리가 너무 크다는 것을 이유로 아주 힘들어했다. 서른 살이면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감정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단다.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A는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 점점 더 좋은 네임밸류를 가지고 있거나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회사로 이직했다. 그렇게 몇 번의 이직 끝에 꿈의 직장에 입성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꿈꾸던 그 직장에서는 이전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이전 회사들에서 항상 아주 좋은 평가를 받으며 한 몸에 기대를 받던 직원이었던 A는, 일개 평범한 아무개 씨가 되어 있었다. 아니, 사실 평범보다도 못 했다. 뱀의 머리 대신 용의 꼬리를 택한 대가로 그저 그런(mediocre) 직원이 된 스스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게다가, 팀장은 본인을 싫어하는 게 명백했다. 석사/박사까지 훌륭한 대학에서 아주 이른 나이에 해치우며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똑똑한 팀장은 A가 그 무엇을 가져가도 성에 차지 않아 했고, 실제로 본인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다수 있었다. 발버둥 쳐도 팀장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 자기 효능감이 박살이 나자 무력감이 찾아왔다. 열심히 해도 C, 열심히 하지 않아도 D-의 성적이라면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경제적인 계산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직장에서 미운오리새끼가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 이야기를 해 볼까.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녀와의 관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찍 정착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인생의 아주 중요한 가치인 A로서는 그녀와의 불만족스러운 관계를 견딜 수 없었다. 서른 살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씌우지 않았으면 그렇게 괴롭진 않았을 것이다. 당장 결혼을 해야 하는 나이에(스스로의 인식 속에서는 말이다) 만난 여자친구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게 A를 아주 조급하게 만들었고, 그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다움을 강요받은 집안에서 자란 A에게 여자친구는 보호해 주어야 하는 존재였고, 그런 연애들을 해 왔지만, 여자친구는 A의 기준에는 지나치게 독립적이었다. 그녀는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분명 그녀는 그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해왔지만, 그에겐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본인은 여자친구에게 '있어서 좋은' 존재가 아니라 '없으면 안 되는' 존재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 여자친구는 부정적인 의미로 완전무결해 보였다. 자신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내가 없어도 그녀의 삶은 다양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정서적으로 아주 안정된 그녀는 그녀만의 매뉴얼로 부정적인 감정들을 승화했다. 그리고 그 승화 시스템 아래에서 그의 역할은 없었다. 그것이 그가 스스로 남성성을 잃게 만든다 느꼈고,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혼란을 가져왔다. 그렇지 않아도 낮아진 자존감으로 인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그가, 맞지 않는 옷과도 같았던 그 연애로 인해 더욱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여자친구와는 달리 본인은 감정적인 문제를 대처하는 매뉴얼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일깨워주었다. 커리어도 실패하고, 토끼 같은 아내와 강아지 같은 자식들이 있는 가정도 당시로서는 도무지 그릴 수가 없었는데, 심지어 본인은 미성숙한 인간인 것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모든 면을 샅샅이 뒤져봐도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단 한 조각을 찾지를 못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커다란 실패자가 되어 있었다. 죽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 안에 삶에 대한 애착,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이고 싶은 욕심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그렇게 힘든 것임을 당시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모습이라면 살고 싶지 않은 것인지, 정말 죽고 싶은 것인지 분간하는 것도 당시 아주 감정적이었던 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A에게 조금은 관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글을 써 내려가니, 몇 년 전 그토록 힘들어했던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스스로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던 당시 나는 그의 세계가 매우 갑갑하게 느껴졌다. 본인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왜 그렇게 스스로를 갉아먹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지금보다 어렸음에도 서른이 인생의 실패를 논하기엔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서른까지 꿈꾸던 커리어를, 배우자를,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해서 왜 본인을 극단으로 내몰고, 사랑받을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른에 못했으면 서른한 살까지 해보려고 하면 되지. 그것도 아니면 서른셋, 서른일곱이면 어떤가. 여자친구와 관련된 일화 관련해서는 그에게 공감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다. (사실 지금도 그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A는 아주 힘들어했다. 그냥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가 울었고, 운전을 하다가 울었고, 상사와 회의를 하다가 울었고, 부모님 앞에서 울었다. 여자친구 앞에서도 매주 울었다. 여자친구에게 진심이 묻어난 농담처럼 죽고 싶다고 여러 번 말을 했고(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고), 여자친구에게는 본인이 정서적으로 힘든 상황이니 관계에 최선을 다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다정한 연인이라기보다는, 부모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어린아이 같이 굴었다. (스스로가 못난 상황을 본인도 알고 있다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해를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자친구는 그를 떠나지 않았다. 아아, 물론 결론적으로 그 둘은 안 맞는 짝이었고, 헤어졌다. 그래도 그 여자친구는 A가 스스로 버림받을 것이라 분명하게 예상했던 순간에 그를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인생의 최악의 시점이라 누굴 챙길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본인은 여자친구에게 소홀했다. 그래서 당연히 그는 그녀가 자신을 금방 떠나 버릴 것이라 생각했고, 언제든 버려질 마음의 준비를 해 두고자 했다. 그런데 그 예상이 크게 빗나갔다. 여자친구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못난 자신을 묵묵히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 주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냐고들 하는데, 여자친구는 그 어려운 것을 해주는 것 같았다. 때로는 다정한 목소리로 응원하면서, 때로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고민을 들어주면서. 또 어떨 때는 요리를 잘하는 그녀가 수산시장에서 조개를 사다가 조개찜을 만들어서 조개를 건져먹고, 남은 국물에 칼국수 면을 끓여 사케를 기울이며 고민을 흘려보낼 수 있게 옆자리에 있어 주었다.


당시 나로서는 여자친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실 만난 지 얼마 안된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그 정도로 깊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데, 잘해주지도 않는 남자친구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에너지와 긍정성을 나누어 주며 그가 일어설 수 있도록,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그녀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잘못된 판단이라고까지 여겨졌다. 본인이 힘들기 때문에 여자친구에게 잘해줄 여력이 없다면서 뻔뻔하게 본인이 잘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을 하고, 뛰어내리고 싶다며 언어폭력을 일삼고, 밝던 그녀에게 먹구름을 몰고 오는 그를 떠나지 않는 게 납득이 안 갔다. 두 사람이 정식으로 연인이 된 다음, 1~2주 만에 그가 갑자기 사실 힘든 상황이라며 죽지 못해 살고 있다고 고백했기 때문에 그런 어려운 상황을 버틸만한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를 왜 떠나지 않냐고 묻지는 않았기 때문에 진짜 이유는 그녀만이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전보다 조금 더 따뜻함과 겸손함을 갖게 된 지금의 나는, 과거 어떤 시점에서 그녀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 본다. 당시 나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던 어떠한 아픔을 그는 가지고 있었고, 그녀는 그 속에서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본 게 아니었을까. 아파본 그녀는 그래서 아픈 그에게 더 모질 수 없었고, 연민인지 사랑인지 헷갈리는 감정 속에서 그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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