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화나는 상황에서 어떤 거라도 뱉어야 마음이 가라앉지.
욕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욕에는 매우 상스러운 뜻이 담겨 있으므로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하진 않지만, 아무 이유 없이 말버릇처럼 하는 습관성 욕은 싫다. 그러나 욕으로써의 욕은 긍정한다. 화나는 상황에서 어떤 표현이라도 뱉어야 마음이 가라앉을 거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시발 비용’이란 표현은 흥미롭다. 시사점이 크다. 무언가에 단단히 화가 났고, 그것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기에 신조어가 된 거니까.
우선 시발 비용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짚고 넘어가자.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에 홧김에 사용하는 비용이라는 뜻이다.
짚어야 할 부분은 두 가지다.
1) 어디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가?
2) 왜 스트레스 해소로 소비 활동을 선택했는가?
- 어디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는가?
시발 비용이 발생하려면 소위 ‘시발’이 나오는 상황이 선행된다. 한 청소년 연구에 따르면 스트레스는 충동구매 경향성을 높인다. 특히 즉각적인 만족, 장기적인 만족, 외모관련 스트레스, 그리고 부모관련 스트레스가 충동구매 경향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권오숙·문성호 2006, 31-46p) 다르게 말하면 나 자신의 부족함이나 나보다 높은 권위자에 의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청소년 때는 부모님이, 청년 때는 무언가의 윗사람이, 직장인 때는 상사에게로 그 대상이 달라질 뿐, 그 양상은 비슷하다.
불만이 있어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는 대상이 있다. 말을 꺼낸 이후 상황이 더 끔찍하여(또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냥 속에 꾹꾹 눌러 담는다. 인류 역사 상 이렇지 않을 때가 언제 있었겠냐마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인권 위원회가 있고, 교육열이 이렇게 높은 나라에서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런 무식한 일이 발생하는 건 슬픈 일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신체 폭력, 언어 폭력, 그 외 폭력이 골고루 산재해있었음에 비해 요즘은 폭력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처벌한다. 이런 법치주의가 폭력을 종식시킨다면 참 좋겠지만, 세상 모든 것은 억누르면 변이, 진화하여 되살아난다. 갈 곳 없는 스트레스는 내면에서 벗어나 만만한 타인을 함부로 대하고,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식으로 변질된다.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이렇게 꼬리 물기가 된다.
한 가정이 있다.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술 마시는 아버지가 있고, 그런 아버지에게 받은 스트레스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한다. 집에 싸움이 그치질 않는다. 그 싸움이 싫은 누나는 부모님이 안 계시면 항상 동생을 때린다. 동생은 그럴 때마다 밖으로 나간다. 지나가는 강아지를 발로 걷어차기 위해.
자기 감정을 타인에게 풀어내는 상황 속에서 흔히 감정은 약자에게 흐른다. 약자는 자기보다 더욱 약한 대상을 찾는다. 분출조차 하지 못 하는 이는 자기 자신에게 미움을 분출한다. 자신을 부정하고, 미워하고, 나아가 죽인다. 힐링의 뜻은 ‘내가 나로써 살아가는’ 것인데, 그걸 할 수 없게 되는 상황. 이것이 스트레스이다.
- 왜 스트레스 해소로 소비 활동을 선택하는가?
헌데 왜 하필 시발 ‘비용’인가? 시발 ‘독서’일 수도 있고, 시발 ‘수다’일 수도 있는데 왜 하필 ‘소비’에 초점을 맞춘 시발 비용이 흐름이 되는가? 왜 시발스러울 때 무언가를 충동적으로 구매하는가?
기저에 녹아있는 마음은 ‘내가 좋아하는 거 참지 않고 마구 살 거야.’ 인데, 다시 말하자면 ‘소비하는 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이다.’ 라고 해석 가능하다. 타인이 끼친 스트레스에 노이로제가 걸린 이들의 처절한 생존 전략이다. 얼마를 썼건, 뭐를 샀건 그 누가 이들에게 어찌 ‘구매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 주인공 되는 기준이 매우 단편적이고, 단순화 되었다는 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왜 단편적이 되었는가? 이를 위해선 인간의 행복 기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행복을 위해선 3박자가 충족되어야하는데 그건 첫째, 일상에 대한 만족감(기쁨). 둘째, 강렬한 자극(쾌감). 셋째, 지속적인 안정감이다.
예전에는 아낀다, 참는다는 개념이 안정성을 높여줬다. 차곡차곡 모으면 집이 커지고, 차가 생기고, 자수성가가 가능했다. 그렇기에 시발스러워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참으라고? 뭐를 위해? 미래가 내 편일지 남의 편일지 모르는데?’ 불확실하다. 그런 전망 속에 만족지연율은 낮아진다. 참아봐야 돌아오는 게 없기 때문이다. 마시멜로우 이야기에서 아이한테 “네가 지금 마시멜로우를 먹으면 마시멜로우를 더 이상 안 줄 거지만, 10분을 기다리면 한 개를 주거나, 두 개를 주거나, 아예 있던 것도 뺏을 수 있어.” 라고 하면 대체 몇 명이나 10분을 기다리겠는가? 도박 좋아하는 사람 빼고.
게다가 일상에 대한 만족감 역시 기대할 수 없다. 있는 것에 초점을 두고 기뻐하는 마음(지족)은 자라나면서 여러 악마와 대면한다. 자본만능주의와 소시민적 삶의 불합리, 현재에 안주하지 못 하게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교육 환경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쉬고 있을 틈이 어딨어? 다른 애들이 네 자리 뺏어가면 어떡하려고?’ 로 설명되는 ‘승자 생존 경쟁’은 만족과 안주를 ‘자유로움’이 아닌 ‘나태함’으로 번역한다. 결국 빠른, 눈에 보이는, 실효성 있는, 자극적인 단순한 기쁨만이 확실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시발 오늘은 나만의 날!” 이다. 참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게 즉각 내 앞에! 이 만능감에 어찌 안 이끌릴까?
- 오늘 걸어왔던 길의 풍경이 기억나시나요?
다들 참 바쁘고 참 불안하다. 본인에 대해 사색하고 고민하고 좌절해야 하는 시기가 낭비로 간주된다. 진정으로 내가 기뻐하는 가치 등을 탐색할 여력이 없다. 당장 사는데 바쁘다. 점점 기쁨의 기준은 먹는 거, 자는 거, 입는 거, 하는 거, 인기, 받는 거 등등 단순해진다.
오늘 걸어왔던 길의 풍경을 기억하는가? 커다란 목적 없이 하늘을 쳐다본 게 언제인가? 당장 모르겠는 과제에 즐거이, 담뿍 깊어져 본 적이 있는가?
가끔의 시발 비용은 자기를 챙기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시발’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방어가 ‘소비’만 있다면 위험하다. 궁극적으론 ‘시발’스러운 일이 줄어들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그 전 ‘시발’스러운 상황에서 무기고를 열었을 때 ‘충동’ 뿐만 아니라 ‘충동적이지 않은’도 보이는, 그래서 쓸 수 있는 속도를 가질 수 있다면 그 삶은 균형 잡힌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