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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언 Feb 27. 2024

시리얼은 간식인가 식사인가

밥 숟가락과 후루츠링

나에겐 지름 약 15cm가량의 시리얼 볼만 몇 가지가 있다. 소재도 다양하다. 강화 유리부터 세라믹, 멜라민, 법랑까지. 양식 스푼도 종류별로 있어서 기분에 따라 매번 다르게 고를 수 있다. 선호하는 시리얼도 두 가지뿐이다.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옥수수 시리얼을 가장 좋아하고, 첵스 초코 시리얼은 그다음이다. 이쯤 되면 음식이나 플레이팅에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 같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사실 그 반대다. 시리얼만큼 맛있고 간편한 게 없어서다. 게으른 나에게 시리얼은 최고의 간식이다.


그런 나에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알록달록한 후루츠링이 한식 대접에 소복하게 쌓여 있었는데,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스푼은 심지어 밥 숟가락이 아닌가(오 신이시여). 한참 출출해진 시간에 무얼 먹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는 신난 얼굴로 후루츠링이 담긴 대접 두 그릇을 쟁반에 담아왔다. 그것도 밥 숟가락을 푹 꽂으면서 말이다. 고봉밥처럼 높게 솟은 후루츠링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릇의 반절도 다 안 채워진 우유를 보고 있자니 나는 웃음부터 터졌다. 그는 '왜? 먹어봐, 맛있어.' 하면서 보란 듯이 한 숟갈을 퍼 먹었다.


자고로 우유는 시리얼의 최소 1.5배 이상은 부어야 한다. 내용물을 다 먹을 때쯤 우유에 배어 나오는 달달함이 별미기 때문이다. 나만의 시리얼 철학이다. 호랑이 시리얼과 첵스는 그 달달함의 풍미가 대단하다. 여행에 가서도 두 가지 종류가 숙소에 없으면 여기 별로네 할 지경이니 말이다. 유년 시절, 폭풍 성장기에도 식사 후에 꼭 시리얼을 후식으로 먹었다. 우유는 늘 시리얼의 두 배로 해서. 그 덕택에 자그마했던 키가 폭풍성장하지 않았나 하는 자부심마저 있다. 간식으로서 나의 시리얼 예찬론은 대충 이러하다.


출처: Pinterest


그런데 이런 오색찬란한 후루츠링을 무려 밥 숟가락으로 먹어야 하다니. 식사 시간도 놓친 데다가, 간식이라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기억 상 후루츠링은 향도 유치한 데다 끝맛도 생각만큼 달콤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과자 색깔이 저 모양이면 색소 덩어리를 먹는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왕부리새가 그려진 박스도 왜인지 모르게 과도하게 활기찬 모양새였다. (왕부리새의 이름이 Sam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는 몰랐을 것이다. 후루츠링 한 그릇을 순식간에 다 비워낸 일이 나에게 얼마나 큰 변화였는지 말이다. 배가 고팠던 것도 큰 이유였겠지만, 시리얼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는지라 후루츠링의 습격은 내 평소 습관을  모두 깨버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밥 숟가락으로 떠먹는 후루츠링 한 사발은 제법 신나는 일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문득 어릴 적 친구 집에 놀러 간 때가 떠올랐다. 어른들이 계시지 않을 때 손쉽게 꺼내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 중 하나는 시리얼과 우유였고, 그때도 밥 숟가락을 사용했겠지?


모든 게 꿀맛인 폭풍 성장기에는 식사든 간식이든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을 전환하는 포인트는 작은 것에서 온다. 관계라는 것도 서로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 아닐까. 하여간에 왜 유치한 맛에 정감이 가는지 모르겠다. 후루츠링을 장바구니에 넣어 놓은 지 오래인데, 결제는 매번 미룬다. 간식과 식사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이가 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한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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