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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Apr 17. 2019

저는 30대, 유망주입니다

어쩌다, 수영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수영인을 만나는 것 만큼 즐거운 경험은 없다.


직장 동료이자 대학원 동기 B가 그렇다. 육아휴직 복직 기념으로 만난 점심 자리에서 알게된 B의 정체는 '상급반 수영 매니아'였다. 사무실에서 주야장천 엑셀 화면만 들어다보는 회계전문가인줄로만 알았는데 스타트까지 배운 상급반이라는 그의 말에 갑자기 B의 앞에 토르의 망치나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가 보이는 듯 했다. B는 아트 사커를 구사하는 '축구 매니아' 이기도 한데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비느라 몇 년 전 무릎 관절이 급격히 나빠졌다고 했다. 좋아하는 축구를 계속 하기 위해 수영을 하는, 나와 비슷한 재활 수영인 처지였다.


내가 샤브샤브를 열심히 건지던 젓가락질을 멈추고 늘어놓는 수영의 매력, 접영의 어려움, 오리발의 즐거움, 워킹맘이 겪는 자유수영의 고충 등등에 B는 신명나게 맞장구를 쳐줬다. 특히 록쌤이 얼마나 열정적인 코치인지, 집에서 스트레치코드를 당기라 할 정도로 지상 훈련을 강조하는 부분은 내 '수영 수다'의 단골 레파토리인데, 난 늘 수다의 절정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선생님이 얼마나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지, 제가 암환자가 아니라 도쿄올림픽 유망주 같다니까요. 하하. 내년에 여자 접영 200미터로 올림픽 나갈지도 몰라요. 하하"


이런 말을 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하하"

늘 애매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두 돌을 앞둔 아기를 키우는 잠잘시간도 부족한 워킹맘이, 그것도 암 수술을 한지 채 1년도 안된 사람이, 다른 걸 떠나 나이 삽심대 중반을 훌쩍 넘긴 아줌마가 언감생심 올림픽 국가대표라니. 영법 중에서도, 그것도 눈물나게 우스운 접영을 구사하는 내가 접영에서도 가장 긴 200미터라니, 듣는 사람도 비실비실 웃음이 터져나올만한 암환자의 '셀프 디스' 다.


"훈련이 국대 상비군급이네. 그전에 전국체전부터 나가야죠. 아니 그러지 말고 구에서 하는 대회부터 차근차근 준비해봐요. 진심으로"


B는 컵에 물을 채우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순간 놀랐다. 감히 '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하는 생각에, 그 허무맹랑한 얘기에 꼭 그렇지많은 않다는 듯, 왜 안되냐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에.



어느 기업의 광고처럼 세상은 변하고있다.

"제가 사장인데요"라고 말하는 카페 아가씨. "나 면접보고 오는 길인데"라고 말하는 할머니. "저 육아휴직 합니다"라고 말하는 젊은 남직원처럼 말이다.


그렇게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도 나는 가끔 나만 여기에 홀로 외롭게 멈춰서있다는 생각을 한다. 쉼없이 움직이는 트레드밀위에 있는 것 처럼 바삐 움직여도 늘 제자리인 것 같았다. 수술 후유증으로, 아니면 워킹맘들 모두가 안고사는 고질병인 만성 피로로 체력이 배터리 방전되듯 깜빡이는 순간에는 더 그렇다. 그리고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목의 상처를 가릴까 말까 멈칫거리는, 이렇게 야속하게 찾아온 봄에는 더더욱 그렇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지으면서 살고있었다. 기분전환을 위해 한 번씩 신던 하이힐과도 허리디스크 때문에 작별했으며 출장 기회가 주어지면 아기 때문에 남편과 나의 캘린더부터 들여다봐야했다. 어쩌다 찾은 '힙스터의 상징' 을지로3가 카페에서는 배경처럼 녹아드는 다른 어린 친구들과 달리 어쩐지 약속장소를 잘못 찾아온 아줌마처럼 어색하기짝이없게 앉아있었다. 30대 초반이라고 말하기에도 염치가없는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기면서 김광석의 노래 가사처럼 매일 젊음과, 찬란히 빛나던 시절과 이별하며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호주에 조지 코로네스라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조지 할아버지는 올해 101세. 그리고 수영 유망주다. 작년에 열린 퀸즐랜드 수영대회에서 95~99세 그룹의 유일한 출전자로 자유형 50미터 신기록을 세웠다. 할아버지의 올해 목표는 자신의 기록을 단축하는 것이라고 한다. 작년에 할아버지의 기사를 처음 보고난 뒤 혹시나 돌아가시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끔씩 구글링을 해보곤 한다. 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다행이 아직도 호주 어딘가에서 건강하게 수영을 하고 계시나보다. 출전자가 1명뿐이라 텅 빈 레인에서 할아버지 혼자 자신의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열심히 수영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아주 가끔 할아버지의 올해 기록과 안부만큼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할아버지가 여든에 수영을 다시 시작한다고 했을때, 그리고 대회에 출전하겠다는 허무맹랑한 얘기를 꺼냈을 때 할아버지에게도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을까?.


 '안될게 뭐 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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