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읽고
무기력함이라는것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오직 할 수 있는 것이란 기도밖에 없는 그 상황, 결국 그 상황이 나를 이끌어가는, 단지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내일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그러한 감정. 열심히 헤어나와보려고 발버둥치지만 언제까지나 그 장소, 그 상황 그대로인 내 상황을 보며 깜깜하고, 답답한 그 상황.
방금전까지 간호사에게 머리를 잡혀가면서도 끌려가지 않겠다고 저항하던 그녀가 권력자인 의사가 등장하자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 라며 눈물로 번진 눈화장 속에 언제 울었냐는듯눈물을 닦으며 정신병원 의사에게 딱 붙어 팔짱을 끼며 몸을 맡기는 그녀, 블랑시는 무기력함 이라는 감정에 인생 전반을 걸쳐 학습한 인물이다.
작중 그녀는 쾌락만을 위해 살아간 존재로 묘사되며, 사랑했던 사람도,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동생까지도 결국 그녀를 철저히 외면한다. 그녀는 '더러운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꽁꽁 숨기며 아무에게도 이야기 해주지 않으며, 거짓말로 일관하며 자신의 과거의 삶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떠벌리는 여자 블랑시. 과연 그녀를 우리는 비방하며 '욕망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거봐라 결말은 항상 예측할 수 있는 그 범위 내에 있지 않느냐'라고 쉽게 이야기 해볼 수 있는 것일까.
블랑시: 스텔라. 너 나를 비난하려는 거지, 네가 나를 비난하려는 거 알아 ……. 하지만 욕하기 전에 이걸 생각해봐……. 너는 떠나 버렸다는 걸! 나는 남아서 고생했다고! 너는 뉴올리언스로 와서 네 살 길을 찾았지! 나는 벨 리브에 남아서 그곳을 지켜 보겠다고 애썼어! 널 나무라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모든 짐을 내가 지고 말았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장 23p)
작중 정신병원에 끝까지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머리채를 잡히며 간호사에게 저항하다 자신의 신변을 결정할 수 있는 정신병원 의사가 등장하자 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내 비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저버리고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라며 이야기하는,그녀의 처절한 모습은 맘을 씁쓸하게 한다.
그녀가 추구하고자 했던것은 쾌락도 아니고, 욕망도 아니라 '생존'이었을 뿐인데. 집안이 망해가며 재산은 사라져 가고, 자신이 의지했던 사람들이 죽어가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도회지로 나가버린 동생에게 그 탓을 하기에는 동생은 너무 어렸고, 견뎌내야하는 상황은 너무 막중했다. 모든것이 무너지고 나서야, 자신의 생존이 눈에 띄었고, 자신을 먹여살릴 새로운 타인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은 깨끗한 사람이며 고풍있는 사람임을 강조하는 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포장된 작중 블랑시는 참 똑똑하고, 유쾌하다. 전직 영어교사였던 블랑시의 대사들은 시적이고, 논리적이다. 또한 항상 하이톤의 목소리와 밝은 목소리를 유지하도록 애쓴다. 자신의 생일날에 자신의 과거를 듣고 오지 않는 애인이 있어도, 그녀는 밝은 목소리를 내며 케이크 앞에 앉는 사람이다. 하지만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이 된다. 철저하게 감정을 삼켜야 하는 그녀, 그래야지만 살아남는다고 학습된 그녀에게는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도 밝은 표정을 해야하는, 울고 싶고, 부르짖고 싶은 그 상황속에도 가면을 써야만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항상 낯선 사람에게 의지해 왔다는 말은 단순하지만 정말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인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이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권력자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기기도 하고, 그 결말은 이미 본인도 알지만, 조금의 희망을 또한 걸어보는 그러한 상황.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그녀를 '극락'으로 데려다 주었지만, 그곳 또한 자신의 실낱같은 희망이었음을 블랑시는 알고 있었을것이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떠날 수 없는 그곳으로 향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욕망을 긍정하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드러내라고 이야기하는 사회이다. 욕구를 긍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 사회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욕구를 긍정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이견은 없으나, 욕구의 종류는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욕구는 분명 건전한 욕구가 있고, 불건전한 욕구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스탠리와 스텔라의 욕구는 건전한 욕구일까?
스탠리라는 인물은 폴란드 특등상사 출신으로 육체중심적인 관능적 존재이다. 그의 몸매는 탄탄한 어깨와 가슴을 가지고 있다. 성격도 쾌활하고 애처가인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삶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애처가인 그의 이면에는 자신의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나가지 않는 모습을 보이니 임신중인 아내를 처참히 폭행하는 모습, 그녀와 화해하고 나서 바로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 자신의 언니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울고있는 스텔라에게 접근해 가슴의 애무를 시도하는 모습은 그의 욕구들이 전혀 상황에 맞지도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육체적인' 쾌락, 욕구임을 알 수 있다. 스텔라도 언니를 매우 사랑하고, 자신의 남편도 사랑하는 정이 많은 여자다.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의 생활에 대해서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매한 인물이다. 임신중 폭력을 당해 심각성을 인지하고 떠나야 한다는 블랑시의 문제제기에도 본인은 이 장소와 스탠리가 좋다며 떠나지 않고 심지어 그날밤 잠자리를 갖는 모습은 그녀의 욕구의 방향성이 현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상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이런 사유로 '스탠리와 스텔라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은 극락인지, 지옥인지?' 에 대한 해답은 얼추 작중에서 해결이 되는 모습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불건전한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은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라는 것이다. 일시적이고 육체-쾌락적이며, 삶의 현상 유지를 위한 외면의 욕구들은 그 전차의 종착역이 지옥일 수 밖에 없음을, 작중 주인공들은 처절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이러한 욕구는 우리의 시각을 비틀어 상황에 대해 타파하고, 문제제기 하는 사람들을 '정신병원'으로 보내 이상한 사람들로 만들어 본인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극락'에 사는 '지옥'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참 아이러니 한 세상을 테네시 윌리엄스는 읽었다.
나의 삶을 사랑하고 긍정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잘못된 길로 행하고 있는것을 "괜찮아, 남들이 뭘 알아?"라고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나를 정말 사랑하는 것은 타인이 나에대해 어떤 부족한 점을 말해주었을때, 주체적으로 솔직하게 받아들일것은 받아들이고, 지켜낼 것은 지켜내는것이 나를 정말 사랑하는 것이다. 스텔라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 일시적인 평화가 유지되는 자신의 상황을 사랑한것이다.
진정한 삶의 긍정은 나를 철저히 비워나가며, 옳은 것들로 채워가는 것이다.
그런 삶이 진정한 평화와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스텔라와 스탠리의 가식적인 평화보다
지금은 괴롭고 힘들고, 비워나가야 하는 과정이지만
내일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나를 다시 한번 성찰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