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주 작가 <은달이 뜨는 밤, 죽기로 했다> 책 리뷰
1. 동화적인 시간 여행, 판타지 성장 소설의 매력
조영주 작가의 신간 <은달이 뜨는 밤, 죽기로 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피 철철 목댕강 느낌의 잔혹한 미스터리일 것만 같지만 의외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드라마 같은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분위기가 제법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렇게까지 소프트하다고?'라며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그간의 경험을 생각하면 뭔가 피의 본능을 억누르고 쓴 것만 같은 소설입니다.
소설에는 작가 스스로 밝히는 것처럼 심한 우울증을 앓으며 불안정하던 젊은 시절의 자신을 닮은 여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자기 부정이 끝에 다다라 죽음을 선택하려는 인물입니다. 인간관계가 정상일 수 없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도울 수도 없습니다. 이럴 때는 "오즈의 마법사"처럼 현실에서 벗어나 신비로운 세계로 모험을 떠나야만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이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말미 겨우 몇 페이지를 남기고서야 이름이 등장하는 그녀는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려는 극단적 시도 중에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고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공간과 조력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신비한 나라 오즈에서처럼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익혀 갑니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시간이 멈춥니다. 그 인물이 원하는 빵을 구우면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시공간으로 옮겨갑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롭게 만난 인물과 관계를 맺고 그 과정 중에 삶의 태도가 조금씩 변합니다.
그녀는 신비로운 시공간을 여행하며 자신과 화해하고 결국 세상 속에 당당히 발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세상과 타인이 나를 미워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녀 스스로가 자신을 괴롭혀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동화처럼 따뜻하고 환상적인 스토리 속에 희망을 녹여 놓은 성장 소설 같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나를 돌아보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2. 타인을 돕는 경험을 통한 자기 성장.
인간이 가장 깊이 좌절했을 때 선택하는 행동은 침묵, 은둔, 극단적 선택 콤비네이션입니다. 인생의 굴곡 없이 무난하고 편한 삶을 살아온 사람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크든 작든 좌절을 겪습니다. 좌절에 객관적 잣대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사자의 상황과 형편, 성격과 기질에 따라 받는 대미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좌절은 늘 아픕니다.
개인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고 감정 센서도 둔감한 편입니다. 원래 그랬다기보다는 성장과정에 보호 동작 차원에서 민감도를 조정해온 결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누가 뭐래도 그다지 큰 상처가 없고 대미지를 크게 받지 않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든 탓도 있습니다. 시간의 축복입니다. 어쩌면 책과 배움과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이 중요함을 알게 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감정 센서가 매우 극심하게 민감한 사람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작가도 상당히 극단에 치우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처를 피하는 방어기제로 회피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라면 소설 속 주인공이 겪는 새로운 모험 이야기가 무척 공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감이 되는 이야기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소설 속에는 시간 여행, 시간 정지 등의 설정이 등장합니다. 이 설정의 핵심은 다양한 시대와 환경, 연령, 성별을 가진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하는 것을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삶의 의욕이 무너져 극단적 선택만을 원하던 주인공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반복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무기력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억지로라도 끙 차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됩니다. 만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에너지가 들어가고 자신의 상태를 끌어올려야 합니다. 소설 속 그녀는 남을 위해 해 본적도 없는 빵을 굽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갈 에너지를 찾아나갑니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그를 도와야 하기 때문에 반강제로 성장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입니다. 도저히 죽을 틈이 없습니다.
작가의 자기고백이자 희망의 노래와 같은 이 소설은 인간의 삶이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서은국 박사는 행복의 조건으로 맛있는 음식과 사랑하는 매우 친밀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조영주 작가는 흐르는 시간과 관계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경험을 통한 자기애의 회복을 행복한 삶을 시작하는 조건으로 들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법입니다. 반대로 남을 돕는 행위를 통해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성장하는 경우도 바람직합니다. 너도 좋고 나도 좋으니 인류애 넘치는 방법이 아닙니까?
3. 힘을 빼고 쳐야 멀리 나간다.
조영주 작가의 소설은 대체로 진지하고 깊은 성찰이 있습니다. 특히 캐릭터의 묘사가 깊습니다. 다소 어려운 작품도 있고, 매우 하드한 작품도 있고, 지나치게 마니악 해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작품도 있습니다. 문해력 타령이 한창인 출판계 현실을 생각할 때 쉽고 편하게 읽기 어려운 작품이 다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작품의 스타일이 편중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앤솔로지에 참여하는 단편들에서는 의외로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은달이 뜨는 밤, 죽기로 했다>는 단편 소설 쓰듯이 힘을 빼고 쓴 느낌입니다. 실제로 힘을 뺐는지 더 썼는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독자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편안하게 쭉쭉 읽었던 작품입니다. 타임 슬립이지만 설정이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아 초등학생도 이해할 만큼 가이드를 잘 해주었습니다. 과학적으로 너무 말도 안 되는 설정에 대해 의문이 들 무렵 주인공의 목소리로 '이거 어차피 판타지야. 따지지 마.'라고 단도리를 쳐주기도 합니다.
만나는 인물들과 시대, 장소, 환경 등을 보면 훨씬 무겁고 진지하게 다가갈 수도 있는 설정임에도 소설의 점도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수준에서 잘 갈무리를 해 나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심각한 메시지를 뿜어낼 수 있는 조건을 만나도 멈춤 없이 쭉쭉 앞으로 나아갑니다. '중요한 건 사람이다. 사람만 신경 쓰자.'라고 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설정 자체가 판타지라 더 환경보다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에 설득력이 부여됩니다.
역사적인 메시지나 묵직한 주제의식을 더 실었더라면 자칫 읽기 힘들고 불편한 소설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의미 있고 작품성이 좋을지언정 많은 대중은 돌아보지 않는 비운의 작품으로 남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이 소설이 얼마나 대중의 선택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수의 대중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리시한 소설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시대적 흐름을 잘 캐치하고 적응해 나가는 작가의 모습이 보입니다.
저는 골프를 치지 않아 잘 모르지만 골프는 참 어려운 스포츠라고 합니다. 골프를 잘 치려면 힘을 빼고 치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야 멀리 칠 수 있다고 합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작가가 이번에는 힘을 충분히 빼고 친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얼마나 멀리 나갈지 궁금합니다. 가능하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