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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경험을 어땠을까?

앤솔로지 <처음이라는 도파민> 책 리뷰

by 돈다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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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앤솔로지의 성공 조건, 기획력과 기술력

앤솔로지의 성공 여부는 한눈에 관심을 끌만한 주제가 있느냐가 핵심입니다. 앤솔로지를 관통하는 그 '무엇'에 호기심이 동해야 독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호기심 끌기가 성공하면 다음은 "누가 참여했느냐?"로 넘어갑니다. 독자들이 신뢰하는 작가가 1인 이상 참여하고 있다면 무조건 픽입니다. 물론 모르는 작가라 호기심이 더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만 읽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 아닙니까?


힙한 기획이 돋보이는 마티스블루 출판사가 이번에도 납득이 가버리는 기획을 들고나왔습니다. 어느 누구에게 들이대도 '아, 나는 말이야~~'라고 읊으며 눈물을 흘릴 그런 기획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강렬한 기억(기쁨이든 슬픔이든 쪽팔림이든)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처음, 첫 경험"이라는 주제입니다.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도 좋지만 이렇게 호불호라고는 있을 수 없는 기획을 뽑아내는 능력은 칭찬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출판사라면 응당 이런 식으로 책을 기획해 줘야지.'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러면 이제 이 흔하지만 힙한 매력적인 주제를 던져 줬을 때 누가 누가 잘 쓰나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아무리 작전이 좋아도 플레이어들이 개판 치면 필패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기획을 잘 하는 출판사가 작가를 잘 못 픽해서 망칠 가능성은 낮겠지요. 결과적으로 김의경, 김하율, 조영주, 정해연이라는 선택은 필승조 가동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세 분의 작가는 너무나 익숙하고 애정하다 못해 혼자 매니저 같은 기분으로 바라보는 작가들인데다가 둘째와 이름이 같아서 무조건 응원하고 싶어지는 김하율 작가까지 라인업이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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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설 같은 첫 경험, 그 짜릿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

<처음이라는 도파민>의 스타트는 김의경 작가의 작품입니다. "첫 키스처럼 조심스럽게"는 제목처럼 첫 키스를 상상할 만한 여학생이 주인공인 소설입니다. 이 나라 어디에서도 만날 만한 부모와 평범하고 착하지만 꿈 많고 하고 싶은 것 많은 아이가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왜곡된 부모들의 생각과 양육 태도가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데 소설에 등장하는 하림이도 마찬가지의 문제를 겪습니다.


말이 안 통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엄마, 원하지도 않는 의대를 준비해야 하는 현실, 친구들과 마음 편히 놀면서 친해질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상황으로 겪는 마음고생과 답답함이 너무나 현실처럼 묘사됩니다. 고2 첫째와 중1 둘째가 절로 떠오르는 소설이라 복잡한 감정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억압된 환경 속에 하림은 충격적인 결정을 하고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김의경 작가에게 기대하지 못했던 의외의 결말입니다. 충격이자 신선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첫 경험은 친구들과의 여행, 외박이었는데 예상을 깨서 더 재미있었습니다.


김하율 작가의 "이혼을 앞두고 열애 중"은 저로서는 생소한 설정으로 시작해 신선했습니다. '시작부터 이런 설정으로 간다고?'라는 생각으로 짧은 분량에 벌어질 다음 이야기가 매우 기대되게 하는 매력적인 소설이었습니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요상하면서 마음이 가는 독특함이 좋았습니다.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작가의 스타일도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중년을 설레게 하는 마무리도 최상입니다. 앞으로 주목하고 관심을 가질 작가님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조영주 작가의 "첫 졸업"은 예상 못 한 주인공부터 흥미로웠습니다. 조영주 작가가 중년 여성이 전면에 등장한 소설을 쓴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봐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기억력이 나빠 생각이 안 나는 것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저에게는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여러 가지 결의 소설을 다양하게 시도해 왔던 작가의 이력을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닙니다만,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중년 여성의 내밀한 심리를 점층적으로 묘사해 나가는 필력이 대단합니다.


주인공의 심리를 쫓아가다 보면 이 사회의 문제가 자연히 보인다는 점도 훌륭합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대인 관계의 어려움이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복잡한 심리를 상징적인 행동이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표현해 내는 지점도 좋습니다. 결말의 사건이 주인공에게 그 정도로 강한 충격으로 다가갈까 의문을 가졌다가도 그 사건 자체는 주인공의 감정을 끌어내는 트리거로 작동한 것으로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한 인간으로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생각에 제 감정을 복잡하게 만든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독한 작가 정해연 작가가 이 앤솔로지를 마무리한 것은 잘 한 결정입니다. 정해연 작가의 "마이 퍼스트 레이디"는 앤솔로지 전체로 봤을 때 좀 튀는데, '앤솔로지를 다채롭게 한다' 정도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스토리가 좀 멀리 갑니다. 세 명의 작가가 일상적이고 평범한 주인공들이 일종의 일탈을 통해 겪는 첫 경험을 묘사하는 것으로 스탠스를 잡았다면 정해연 작가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피를 보고 말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그냥 평소 하던 대로 독한 소설을 주제에 녹여 버렸습니다.


설마 첫 경험에 남의 입술을 뜯어내는 살인마 이야기를 가져올 줄이야 싶었습니다. 이거 너무 한거 아니야 싶다가도 이게 정해연이지 싶기도 하고 거참, 거시커니 하지만 결국 독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의 니드를 채워줍니다. 의외로 차분해서 이건 뭔가 건강식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에 핫 소스를 팍팍 뿌리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임팩트 있는 이야기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소재가 돋보이는 <처음이라는 도파민>은 읽으면서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여지가 많은 소설입니다. 과거를 소환하거나 자신의 판타지를 대입하는 방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돕습니다. 소심해서 차마 해보지 못했던 일탈의 아쉬움을 달래고 무모하게 벌였던 첫 경험의 짜릿한 경험도 되새기는 이 소설집은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를 말할 때 들이밀기 딱 좋은 소설입니다. 즐거움과 소설적 효능감 넘치는 이 앤솔로지를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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