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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란 Aug 03. 2018

나를 가장 솔직하게 만들었던 감정들

'랜드 앤드(Land's end)'에서



"위험한 상황을 겪으면서 위험을 극복하고 피한다. 황무지를 여행한다는 것은 어려움과 맞선다는 뜻이다. 새로운 길을 갈 때면 어려움을 찾아 나선다. 단 어려움의 정도는 내가 감수할 수 있는 그만큼이어야 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의 수준을 고려하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다."


_ 라인홀트 메스너 (이탈리아 산악인)     







  여행을 자주 다녀온 사람이나 장기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남들에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무용담이다. 살짝 과장하고, 심각한 표정을 더하거나 덤덤하게 심각했던 상황을 이야기하며 절로 몰입하게 되는 그런 무용담 말이다. 대부분의 무용담이 그러하듯, 시작은 좋게 모험심, 나쁘게 무모함에서부터 출발한다.


  나도 그랬다. 시작은.



모험심과 바꾼 풍광



  사실 나의 영국 여행에서 모험심이 들어올 틈은 별로 없었다. 여행 계획은 꼼꼼함을 넘어 촘촘히 빈틈없이 채웠기 때문이다. 하루에 보기로 생각한 것들, 이동시간 및 경로는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심지어 대체 교통수단까지 준비했던 터라,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전 계획을 세우는 건 한정된 시간 동안 여행할 수 있는 여행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날도 대중교통시간, 도보 이동시간, 방문지의 개관시간은 물론이고 성 미카엘 언덕을 방문할 때는 간조시간과 만조시간을 한국에서 모두 미리 다 확인했었다. 정말 완벽했다. 하지만 이후 내 계획은 참 쉽게 무너졌다. 그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했다. 보통 여행 계획이 틀어진 이유처럼.



“자연의 은밀하고 악의적인 방해와
인간의 경솔한 본성”



  런던에서 기차로 환승 없이 갈 수 있는 최남단 도시, 팬젠스.


  종착지에 도착했다는 묵직한 소리를 내는 기차역 바로 앞에 팬젠스 종합 버스 터미널이 있다. 종착역에 도착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의 '집과 가족'을 찾아온 사람과 '자신'을 찾으러 온 사람으로. 결국 무언가를 찾는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또 굉장히 다른 만남을 고대하며 찾아온다. 도시에 비해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버스 정류소에 서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콘월은 주로 가족 단위의 휴양객이 많이 오는 곳이라,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보다 자신의 차로 이동하는 사람이 더 많은 듯 싶다. 가뜩이나 사람이 없는 정류소에는 기차 시간이 한참 남았는지 더 한산했다. 예정된 시간을 겨우 10분 넘기고 버스가 도착했다. 줄을 서 있던 난 가장 먼저 버스에 올라타 2층 야외 자리에 앉았다. 목적지는 랜드 앤드. 영국 최남단 리저드 반도의 바위 절벽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특히 약 480km가 넘는 멋진 콘월 해안선 중 남다른 상징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콘월의 명소 중 하나다.      



Newlyn



  팬젠스에서 A1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 이동하면, 랜드 앤드에 도착할 수 있다.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는 여정을 생각했다면, 얼마지나지 않아 실망할 것이다. 뉴린을 지나갈 때 잠깐 동안 바다를 볼 수 있을 뿐 버스를 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바다를 볼 수 없다. 왜 그럴수밖에 없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2시간 후 나는 내 두 발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가 본 풍경은 드넓게 펼쳐진 초록빛 대지, 울창한 나무들이 도로를 애워싼 숲, 사람의 자취를 찾기 힘든 빈 마을의 모습이었다. 지나는 동안 볼 수 있는 풍경은  콘월의 관광지만 다녔던 내게 또 다른 모습들이었다. 관광지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상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여행자인 나와 다른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건 여행자의 특권 중 하나다. 그리고 거친 길을 달리는 버스가 주는 스릴은 덤이다. 숲을 지나갈 때 나뭇가지에 이마를 긁힐 수 있고, 거센 바람에 모자가 날아갈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또 여행의 묘미다.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별로 없는 정류장을 수십 개 지나가면 드디어 종착지이자 버스가 회차하는 랜드 앤드에 다다른다.     



도로가 좁기 때문에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버스에서 내리면 보이는 풍경은 사실 좀 뜻밖이었다. 내가 런던에서 기차와 버스를 타고 떠나온 후로 바라본 풍경들과 굉장히 달랐기 때문이다. 랜드 앤드에 도착해 내 눈에 먼저 들어오는 곳은 바로 ‘랜드 앤드 테마 파크’다. 잉글랜드 섬의 남쪽 끝에 자리한 테마파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경쾌한 음악으로 가득 차있지만, 그 뒤로 펼쳐진 대서양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테마파크 덕분에 그 너머에 보이는 풍경이 극적으로 보인다.      


  콘월은 19세기에 구리와 주석의 생산지로 300개가 넘는 광산이 있었고, 4만 명이 넘는 광부들이 일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1913년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광산은 문을 닫았다. 이후 콘월은 지역 정체성을 “관광”으로 세웠고, 많은 사람들이 여행 오고 싶은 지역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예술가들이 만든 아름다운 세인트 아이브스나, 천연 요새인 성 마이클 언덕, 바다로 둘러싸인 3면 곳곳에 자리한 해변가가 그 증거다. 하지만 랜드 앤드에 자리 잡은 테마마크는 그동안 내가 본 콘월의 풍광과 어울리지 않았다.  혹은 상업적인 모습은 자연과 어울리지 않다는 편견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 말고도 많은 듯 싶다. 그도 그럴것이 그곳을 지나면 볼 수 있는 바닷가에 곳곳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테마파크에 머무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긴 듯싶었다.



랜드 앤드 테마 파크 입구


 

  바다 바람과 주차장의 모래가 뒤엉킨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해 기념품 가게와 놀이기구가 있는 테마파크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다. 굳이 이곳이 아니더라도 볼 수 있는 풍경 말이다. 하지만 땅끝 마을에서 테마파크를 찾아보기 힘들 듯,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는 어떤 사람들에겐 특별한 경험을 안겨줄 것 같다. 다만, 그 어떤 사람에 내가 들어가지 않아 아쉬웠을 뿐이다.  


  테마파크를 지나 서서히 내 시야에 차오르는 짙푸른 바다와 태양에 지지 않는 옅은 하늘은 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배에 돛을 올리고 바라보는 망망대해의 모습을 처음 본 초보 선원의 마음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출항을 눈앞에 두고 들뜨지만 동시에 막막한 불안감이 뒤섞인 느낌 말이다. 좁은 도로를 따라 보았던 초록빛 수목들과 다른 빛깔의 푸른 풍경은 내 예상보다 더 극적이었다. 그래서 가파른 절벽 아래 펼쳐진 바다는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었고, 그 마음이 나의 모험심에 불을 지폈다. 모험심 덕에 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짚어보지 못했다.  


 






랜드 앤드 옆에는 나같이 쉽게 모험심에 불타오르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길 하나가 유혹한다. 정확하게는 랜드 앤드가 그 위험한 유혹 중간에 놓인 것이지만. 바로, 영국에서 가장 긴 도보여행길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 South West Coast Path다. 콘월과 데본 주를 오가는 코스로 무려 630 마일, 1000km가 넘는 길이를 자랑한다. 2012년 세계적인 잡지 미국 스미소니언(Smithsonian Magazine)에서 꼽은 ‘세계 10대 도보여행길’에 꼽힌 잉글랜드 북부의 코스트 투 코스트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다양한 경관과 옛사람들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도보여행길로 많은 사랑 받고 있다.


   우리가 걷는 길의 대부분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흔적이다. 흔적을 남긴 그들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흔적을 따라갔을 것이다. 원래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는 해안 경비대가 정찰하기 위해 다니던 길이었다. 콘월 땅을 지키기 위해서 오갔던 걸음이 만든 길답게, 다니다 보면 오래된 돌담과 같이 정찰대들의 초소를 살펴볼 수 있다.      





  처음부터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를 갈 생각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이 길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고, 물집이 잡힐 정도로 한바탕 걷고 숙소에 들어와 내가 걸었던 길이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라는 걸 알게 되었다. 원래 나의 계획 대로라면, 랜드 엔드를 끝으로 팬젠스에 알아둔 식당에서 맛있는 해산물 음식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해산물 저녁 식사와 편안한 휴식과 재충전을 뒤로하고 난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를 선택했다. 꽤 거창한 선택 같지만, 오밀조밀 랜드 앤드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즐기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산책이 그 출발이었다. 오른편에 철썩 거리는 파도 소리. 왼편에 거친 풀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땅의 경계. 이 사이에 나있는 길은 내 걸음을 부추겼다.


  걸음을 걷는데, 왠지 내가 걷는 이 길이 드라마 <폴다크>의 로스 폴다크가 바다를 바라보던 길과 겹쳐 보였다. 미국 독립전쟁에 나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까스로 돌아온 고향 콘월에 그를 기다리는 건 폐광과 하인 2명뿐이었다.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아버지도, 진심을 다해 사랑한 연인도 잃고 허망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바다, 다시 광산을 일으켜 세우리라 결심하고 바라보던 바다, 차근차근 시련을 이겨내며 바라보던 바다가 이 바다였겠구나 싶었다. 노을이 지기 직전에 타오르는 하늘과 하늘빛에 물든 바다와 달리 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짙은 파란색 그 자체였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꽉 차오르는 것 같았다.


  점점 내가 출발했던 랜드 앤드 땅이 점처럼 작아져가고, 인사를 건네던 사람의 빈도가 줄어들어갔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두렵지 않았다. 어떤 목표점도 없었음에도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컸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속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았는데 못 찾았잖아. 그래서 생각했는데 우리가 집으로 가는 길 대신 모래 구덩이를 찾는다면 분명 모래 구덩이를 못 찾게 될 거야. 얼마나 좋아? 그러면 우리가 찾지 않았던 다른 뭔가를 찾게 될 것이고, 어쩌면 그게 우리가 원래 찾던 집일 수도 있잖아."      



  낙천적인 곰돌이 푸와 같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길을 걷다 보면 무언가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을 보더라도 나에게 의미를 안겨줄 것 같은 기대감이 마음이 부풀었다. 1주일 남짓 여행을 다니며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내가 내린 가장 잘한 결정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때에는. 

  그도 그럴 것이 난 내가 길을 잃을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지나온 길처럼 내가 걸어갈 길도 계속 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목표를 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잠시 앉아서 가방에 싸온 귤과 배를 먹으며 구글맵을 확인했다. 제법 많이 걸어왔지만, 숙소가 있는 펜젠스까지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를 따라 걷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난 갈 수 있을 만큼 간 다음에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 버스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막차시간은 오후 7시에 있으니까, 아직 3시간 정도 더 걸을 수 있었다.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에서 우리는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스마트폰과 함께 하는 여행은 편리하지만, 동시에 여행의 자리에 일상을 두게 된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스마트폰 대신 지도를 들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지도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원래 볼 수 있는 세계보다 작은 한정적인 정보만을 보게 되니, 길을 잃기를 적극적으로 권하는 두 사람이 쓴 『여행의 기술』의 저자는 여행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행자들은 그저 외부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에 마주한 자신을 탐구한다.”      


  처음에는 부지런히 걸으면 해지기 전에 숙소에는 도착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또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기도 했었다. 하지만 갈 길은 멀고 그 길을 혼자 걷다 보면 초반에 느긋한 생각은 점점 사라지고 만다. 나도 모르게 걷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누군가 앞서 걸어간 길이 있다는 건 굉장히 든든한 힘이 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긋는 땅과 수평선을 긋는 바다를 보며 걸으면 굉장히 넓은 공간에 고립되어 있다는 모순된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 순간 길에 대한 상황은 바뀐다. 내 모험이 무모함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선택했던 길에서 불안함이 찾아왔다.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정말 잘한 선택인지 아닌지는 그 순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내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던 때의 사진을 보았다. 그 뒤로 이어진 풍경은 영국에서 마주친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불행하게도 그 훌륭함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은 여유가 없었고, 많은 시간을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게다가 제대로 난 길이 눈에 바로 들어오지 않을 때면 약간 불안감도 들었다. 지금 혹시 길을 잘못 들어 낙오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더욱 짙어지는 초조함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그 느낌은 아주 잠깐이었고, 이내 길을 찾아 걸어가면 사라지는 감정이었지만 한번 초조함을 느끼면 제대로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확인하게 된다. 그제야 애써 부정했던 내 마음속에 스며든 불안이란 감정과도 마주설 수 있었다.


해안가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이 안내 표지판 뿐이다.

툭. 내 뺨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소나기를 만난 것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비가 올게 뭐람.”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비를 피할 곳도 없었고, 비를 피할 우산도 없었다. 폴리머스의 거친 비바람에 한국에서 챙겨 온 우산이 망가져 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비는 거친 장대비가 아니라 여우비였다. 해가 저 멀리 보이는 걸 보니, 얼마 안가 그칠 것 같았다. 비를 맞으며 앉아있기보다 천천히 걷기로 했다. 하지만 불안한 내 심장은 평소보다 빨리 뛰었고, 천천히 걷기로 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걸음으로 다음 해안 절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미끄러졌다. 정말 순간의 일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길을 걷다가 넘어질 뻔한 것이다. 다행히 미끄러지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잘못 넘어졌다면 돌부리에 무릎을 그대로 찍을 뻔했다. 그리고 더 잘못되었다면, 대서양이 내 인생의 무덤이 될 뻔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대로 바위에 걸 터 앉았다. “잘못 넘어졌으면 해안 절벽으로 떨어졌겠네. 적당히 걷다가 돌아갈 걸 그랬다. 이젠 돌아가기도 틀렸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뭐 하러 이 길에 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번 여행은 내가 영국 산천의 수많은 장관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에, 지나치게 옆길로 샜다가는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슨의 말이 마치 내게 하는 말처럼 와 닿는 순간이었다. 스티븐슨은 달링턴 홀에서 대를 이어 집사를 맡은 베테랑 집사다. 갑작스레 주인이 바뀐 달링턴 홀을 떠나 처음으로 장기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는 옥스퍼드 셔에서 자신의 첫사랑인 켄턴 양에게 받은 편지를 가지고 그녀가 살고 있는 콘월로 여정을 떠난다. 소설은 서서히 잉글랜드 남부로 걸어가면서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과 그가 집사로 지낸 과거의 경험들이 교차하며 스티븐슨이란 인물을 보여준다. 이 여정은 그가 원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새로운 주인 패러데이의 권유로 시작한다. 그는 여행 중간중간 달링턴 홀에 대한 걱정을 한다. 다행히 달링턴 홀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의 시선을 이끄는 이색적인 장소에 감탄한다. 일평생을 집사로 살며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생각한 스티븐슨은 때때로 자신의 자만심을 보기도 한다. 오랜 시간, 여행을 하면서도 굳게 믿었던 켄턴 양의 마음이 자신의 착각임을 확인한다. 그는 부정하거나, 당황하기도 하지만 이내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인생에서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여행에서 스티븐슨은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켄턴 양은 자신이 콘월로 온 것을 후회한다고 생각하고, 스티븐슨을 좋아한다고 착각한 그의 마음이 구겨진 것을 눈치 챈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 하긴,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도 없으니까요.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 ”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이나 실수를 부여잡으며 시간을 낭비한다. 때로는 아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을 실패라고 규정하고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처량하게 앉아 있는 나처럼 말이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만약에 다른 결정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한다. 하지만 켄턴 양의 말처럼 과거의 가능성에 매달리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녀의 말에 “당신도 지적했듯이 우리는 ‘지금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라는 스티븐슨의 말처럼.      


Why are you walking? (너는 왜 걷고 있니?)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나 역시 계속 여정을 계속해야 했다. 아직 이 길은 끝나지 않았다. 결코 실패가 아니라, 남다른 고비를 넘긴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만들 ‘지금’이 나에게는 있었다. 이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난 ‘마치 떨어뜨린 귀한 보석을 찾고 있는 사람처럼.’ 길을 걸었다. 마냥 좋아서라고 했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이 길을 걸으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걸었던 것이다. 마치 무지개 끝에 있는 보물을 쫓는 아이처럼. 왜 난 걷고 있을까. 지금 난 왜 걷고 있을까.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바꾸어,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로 정리했다. 지금 나는 걷는 이 순간에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안갯속에서 헤매면서 무엇인가를 배운다고 한다. 하지만 어둠 속을 헤맬 때, 어둠이 한순간 탁 걷혀 시야가 밝아지는 일은 없다. 이때 진짜 안개일 수도 있지만, 마음속의 안개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초보자에게 안개는 어둠이나 마찬가지일 뿐이라는 점이다. 다행히 난 진짜 안갯속에 있지도 않고, 내가 걸어야 할 길은 분명했다. 의기소침해진들 얻을 것이 없었다. 다시 강하게 빛을 내는 태양마저 허비한다면 난 더 큰 두려움에 마주설 게 분명했다. 나의 도보 여정은 이후에도 꽤 험난했다. 버스를 타기로 한 나의 계획은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면서 틀어졌다. 덕분에 도로를 따라 펜젠스로 걸어가야 했다. 랜드 엔드에서 도보 6시간 만에 숙소 앞 바닷가 벤치에 앉을 수 있었다. 발바닥은 화끈화끈 뜨거워졌고, 허벅지 근육이 뻐근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너무 예뻐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이 웃음이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나온 웃음인지. 마라톤 선수처럼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바다 위의 하늘이 옅은 적색으로 바뀌었을 뿐이어서, 햇볕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도 지난 30분 사이에 선창에 모여든 이 사람들은 벌써 어둠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눈치들이다. 이것만 보아도, 조금 전에 이 벤치에 나와 나란히 앉아 묘한 이야기를 나누고 간 사람의 말이 맞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 같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선창에 불이 들어왔을 뿐인데,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왜 이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겠는가?     





  펜잰스의 풍경이 아를에서 고흐가 밤에 바라보았던 풍경으로 바뀌어갔다. 푸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며, 짙은 어둠이 드리워질 때까지 가만히 벤치에 앉았다. 굉장히 행복했다. 길가에 커다란 가로등 불빛이 바다에 비치며 만든 모습은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 그 자체였다.   







<참고문헌>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2010)

여행의 기술, 카트린 파시히, 알렉스 숄츠, 김영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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