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내셔널갤러리 National Galley in London'안에서
우리가 일단 아름다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면, 예술 작품은 자잘한 방식으로 우리가 여행하고 싶은 곳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_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중...
런던 내셔널 갤러리는 가지고 있는 타이틀이 많다. 미국 내셔널 갤러리와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이라는 타이틀,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과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의 작품을 모두 수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라는 타이틀,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에 소개된 도판을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이라는 타이틀 등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인상 깊게 생각한 건 "국립미술관이지만 유럽 대륙 내 수많은 다른 미술관과 달리 왕가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지 않고 있으며, 영국 화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하지 않고 있다"는 조금 이상한 타이틀이었다.
영국 화가 작품이 많지 않지만, 국립 미술관이란 이름을 내건 이유가 궁금했다.
어떤 일을 할 때, 적당한 경쟁은 더 좋은 결과를 부른다. 자기보다 느린 사람과 달릴 때보다 자신보다 빠른 사람과 달릴 때, 기록이 더 좋아지는 것처럼.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세워지는 과정도 비슷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은 급속도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유럽 대륙 내 나라보다 더딘 편이었다. 1779년 독일, 1789년 이탈리아, 1793년 프랑스에서 국가 개념의 박물관이 처음 문을 열고 기다렸다는 듯이 미술관을 개관했지만 영국은 좀처럼 국립 박물관과 미술관을 열지 않았다. 옥스퍼드의 애슈몰린 박물관이 영국의 자존심을 세워주긴 했지만, 국가 미술관이 없다는 건 영국 입장에서 자존심이 퍽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미술품을 거의 소유하지 않은 정부는 국립 미술관을 세우는데 미온적이었다.
내셔널 갤러리가 트래펄가 광장에 문을 열도록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준 건, 영국과 애증의 관계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1793년 루브르 박물관이 문을 열자, 영국 언론들은 지지부진한 국립 미술관 건립 현실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1768년부터 왕립 아카데미에서 정기적인 전시를 열고 있었지만, 정기 전시를 열 수 있는 미술관 부지 선정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론뿐만 아니라 국립 미술관 건립이 필요하다고 느낀 영국의 대표적인 화가 컨스터블은 "머지않아 고루한 영국에서 미술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결국 화가가 아닌 회화 수공업자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이 완벽함의 형가 기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편지로 회화 중심의 국립 미술관이 없는 현실을 비판했다. 영국 정부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이야기이지만 결국 7년 동안 미온적으로 추진되던 미술관 건립 프로젝트의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들었다. 이후 1823년 컨스터블의 후원자였고, 이후 국립 미술관의 핵심 후원자가 된 조지 버몬트 경은 자신의 개인 소장품을 국가에 헌납하기로 약속했고, 뿐만 아니라 보관 전시할 수 있는 장소 제공까지 약속했다.
1824년에 내셔널 갤러리는 문을 열었다. 1824년에 열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 바로 이때 오스트리아가 전쟁 부채를 값은 해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로부터 받은 배상금 덕분에, 무려 6만 파운드라는 예산이 그림 구매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되었다. 영국 정부는 1823년에 사망한 존 율리우스 앵거슈타인의 저택과 그가 수집했던 예술품 38점을 구입한다. 덕분에 내셔널 갤러리 컬렉션 1호(NG1)는 앵거슈타인의 소장품이었던 세바스티아노 델피옴보의 <나사로의 환생 (1517-1519)>다. 내셔널 갤러리에 갔다면, 내셔널 갤러리의 1호 컬렉션을 꼭 확인해보길 추천한다. 8번 방에 가면 볼 수 있다.
세바스티아노 델피옴보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당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함께 활약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 화가다. 베네치아 출신인 그는 미켈란젤로와 친분이 있었는데,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 역시 미켈란젤로가 만들어줬다.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는 나바론 대성당에 기부할 커다란 제단화를 그릴 화가를 찾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변모 (1516-1520)>를 의뢰한 라파엘로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미켈란젤로가 충고로 세바스티아노에게 맡기기로 했다. 라파엘로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에 비견할만한 그림을 완성하고 싶어 했고, <그리스도의 변모>에 일부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미켈란젤로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스케치에는 그림 속 나사로와 그의 붕대를 풀어주는 사람이 있고, 전해지는 말로는 예수까지 세바스티아노와 함께 그렸다고 한다. 세바스티아노의 실력을 믿지만,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의 그림에 필적할 작품을 완성하려면 자신의 솜씨가 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보면 미켈란젤로와 세바스티아노의 공동작품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만 할뿐 진짜 그가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미켈란젤로 덕분인지 세바스티아노가 혼신을 쏟은 덕분인지 <나사로의 환생>은 멋지게 완성되었다. 1519년 5월에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며, 이 그림으로 세바스티아노에게 미켈란젤로와 동급 화가라는 극찬을 쏟았다고 한다. 1년 뒤, 라파엘로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 의뢰했던 <그리스도의 변모>를 미완으로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난다. 이 때 미완의 <그리스도의 변모>와 <나사로의 환생>이 나란히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두 그림을 의뢰한 줄리오 데 메디치는 두 개 중 하나를 자신이 소장하기로 한다. 그는 어떤 그림을 선택했을까?
줄리오 데 메디치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가지고 싶어서 그랬는지, <나사로의 환생>이 나사로의 성유골을 모신 대성당에 적합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변모>는 자신이 가지고, 나르본에 <나사로의 환생>을 보냈다. (참고로 <그리스도의 변모>는 바티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세바스티아노가 혼자서 완성했을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나 마르다의 모습이나 시체 냄새에 찡그리고, 3일 만에 살아난 사람을 보고 놀란 사람들의 표정이나, 그림의 색감만으로 그의 실력 역시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과연 그가 혼자서 그림을 완성했다면 내셔널 갤러리 컬렉션 1호가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모>가 되었을까?
내셔널 갤러리 1호 컬렉션을 보고 난 뒤에 세인즈베리 별관의 61번 방으로 가서 라파엘로 작품들을 감상해보길 추천한다.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모>는 없지만, 그가 그린 또 다른 제단화 <안시데이 마돈나(1505)>를 볼 수 있다. <안시데이 마돈나>는 베르나르디노 안시데이가 페루자 성당의 가족 예배당에 기증하기 위해 의뢰한 그림으로 줄리오 데 메디치랑은 관계가 없다. 그렇지만 내가 줄리오 데 메디치라면 누구의 그림을 골랐을지 생각하며 감상하다 보면,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릴 능력을 가진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할 재력과 권력을 가졌던 그가 몹시 부러워질지도 모른다. 솔직히, 내가 그랬다. 내 키를 훌쩍 넘기는 그림들을 의뢰할 수 있었던, 교황 레오 10세의 사촌인 그가 좀 부럽긴 했다.
앵거슈타인은 여러모로 내셔널 갤러리와 인연이 깊다. 그의 소장품이 내셔널 갤러리 1호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집 팔 몰(Pall Mall) 100번지는 183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기 전까지 갤러리였다. 내셔널 갤러리 본관은 웅장한 규모와 적당한 시간이 드리워져 런던의 상징인 트라팔가 광장을 지지하는 축처럼 보이지만 처음 윌리엄 윌킨스가 완성했을 때는 지금의 모습과 사뭇 달랐으며, 꽤나 혹평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만들어지기까지 오래 걸렸을 뿐 내셔널 갤러리가 잘 나가는 대영제국의 국립 미술관으로 위엄을 갖추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1870년에 기부와 유증으로 받거나, 내셔널 갤러리에서 자체로 구입하여 수장품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수장품을 보관하기 위해 증축할 수밖에 없어 지금의 중앙 건물 뒤에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 위한 터를 닦았다. 1878년에 7개의 전시실을 확장했고 중앙 건물 위로 돔을 얹었다. 이후 1900년대에도 계속해 증축이 이루어졌다. 1991년에 영국의 슈퍼마켓의 창립자인 존 세인스버리 남작과 그 형제들의 후원으로 로버트 벤투리가 컬렉션 가운데 초기 회화를 전시하기 위한 세인즈베리 별관을 지었다. 내셔널 갤러리가 계속해서 확장 공사를 실시했지만 지켜온 원칙이 하나 있다. 바로 모든 미술품이 한 층에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다른 미술관이나 경사를 따라 관람하는 구겐하임 미술관과 달리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다. 세계적인 명화를 마치 평지를 산책하듯 관람할 수 있다는 건, 내셔널 갤러리가 자랑거리 중 하나다.
내셔널 갤러리는 특별한 때에 음악회가 열렸다. 요즘은 미술관에서 특별 전시나 소장품과 관련된 음악회, 콘서트를 여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처음 음악회가 열린 때가 1939년 10월 10일이었다. 1939년 10월은 격동의 시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 전역이 어수선했을 뿐만 아니라 불안과 공포가 런던을 감돌고 있던 때였다. 내셔널 갤러리도 전쟁의 공포가 빗겨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내셔널 컬렉션이 유실될 것을 염려해, 영국 정부는 웨일스의 슬레이트 광산을 비롯해 공습에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전쟁 중에 국가는 미술관 문을 닫을 것을 명령했고, 문을 굳게 닫은 채 전쟁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비어있는 미술관은 한 피아니스트의 제안으로 콘서트장으로 바뀌었다.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는 당시 내셔널 갤러리의 관장이었던 케니스 클라크 경을 찾아가 미술관에서 음악회를 열 것을 제안했다. 전쟁이라는 극한 공포 중에도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은 그녀의 제안에 따라 내셔널 갤러리에서 매일 오후 1시에 런치 타임 콘서트가 열렸다. 입장료는 1실링에 불과했다. 마치 뉴욕 필하모닉 교양악단의 무료 연주처럼 많은 사람들이 음악이 주는 위로를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이 런치콘서트에 담겨 있었다. 그 결과 평소에 클래식을 즐기지 못했던 사람들도 콘서트를 즐길 수 있었고, 약 75만 명이 런치타임 콘서트를 다녀갔다. 이후, 마이라 헤스뿐만 아니라 전문 연주가나 아마추어 연주가들은 런치타임 콘서트에서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 헨델 등 다양한 클래식 음악을 연주했다. 전쟁속에서도 미술관은 영국인들의 마음속에 클래식 선율이 울리는 공간이 되었다.
25번 방은 런치 콘서트를 연상하게 만드는 그림이 있다. <콘서트 (1626)>다. 전쟁 중에 음악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를 보여준 런치 콘서트와 묘하게 닮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콘서트>를 그린 화가는 렌드릭 테르 브루겐이다. 그는 렘브란트와 마찬가지로 17세기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화가다. 17세기 초 로마로 유학을 떠났던 화가들은 새로운 화풍에 매료되었는데, 바로 카라바조가 만든 '키아로스쿠조(chiaroscuro)'였다. "마치 어두운 연극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듯 명암을 더욱 극명하게 대비시켜 몰입도를 높이는 화풍"으로 렘브란트와 렌드릭테르도 이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그림이 연극과 같은 극적인 감동이 배어 있다. 빛의 화가로 알려진 렘브란트야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고 궁금했지만, 25번 방 화가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다. 25번 방은 전혀 모르는 화가들이기도 했고, 22번 방에 있는 렘브란트 그림을 감상한 후 다른 전시실을 관람하러 이동하던 중에 지나치는 통로 정도로 생각했다. 원래 관람할 계획이 없었는데, 마치 나를 쳐다보는 듯한 두 사람의 시선에 이끌려 그림 앞에 섰다.
마치 "너도, 함께 할래?"라며, 초대하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내는 그림. 바로, <콘서트>였다. 제목에 이끌려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음악 파티는 네덜란드 가정, 술집 등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촛불 아래 작은 콘서트를 연 세 사람의 모습은 평범한 음악 파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 네덜란드 회화에서 음악은 '사랑'을 뜻하지만, 이 그림에선 '초대'하는 느낌이 든다. 작은 촛불 아래서 연주하는 악기는 상상 속 이상 세계를 표현한 것이고, 이국적은 옷차림도 당시 네덜란드에서 입는 옷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회화에서 음악은 '사랑'을 상징하지만, 이 그림에선 '초대'라는 느낌이 든다. 같은 화가의 작품이며, 그 옆에 놓인 <류트 연주하는 남자 (1624)>에서 느껴지는 경쾌함과는 다르다. 코가 붉은 남자는 아무래도 거나하게 취한 뒤 사랑의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듯싶지만. <콘서트>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그 이유는 촛불이 만드는 아늑한 분위기 때문이다. 촛불 빛이 따뜻하게 공간을 채운 모습이 음악이 공간을 채우는 것과 닮아, 그 공간에 자연스럽게 나도 함께 물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촛불 아래서 누군가는 악기 연주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목을 풀며 노래 연습을 하는 모습을 따뜻하고 은은하게 만들고 있다. 내일 열릴 콘서트를 위해 연습하고 있는 모습은 아닐까. 내일 열릴 콘서트에 합을 제대로 맞추기 위해 조율하는 그들의 음악소리를 듣고 살짝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에게 "너도, 함께 할래?"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것 같다. 같이 연주해도 좋고, 혹은 우리의 연주를 함께 즐기는 방식으로 동참하자고 말하는 듯싶다. 얼마나 연주를 했는지 붉은 모자처럼 물든 뺨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연주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아마 촛불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눈에 어린 초대에 거절할 사람은 없지 않을까.
1940년 9월 7일부터 런던에는 밤낮으로 폭탄이 떨어졌다. 공습으로 인해 내셔널 갤러리의 전시실 일부가 파괴되었고, 남아 있던 폭탄 잔여물이 터져 매우 위험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밤에 런던에 공습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다시 찾아올 낮에 열릴 런치 콘서트를 위해 <콘서트> 그림 속 세 사람처럼 준비를 했을 것이다. <콘서트>처럼 뺨이 붉게 물들 정도로, 누군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연습하는 모습을 봤다면 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연주자들이 어떻게 런치타임 콘서트를 준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듣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왔던 이유는 전쟁 중에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주는 감동뿐만 아니라, 그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연습했을 연주자들의 드러나지 않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런던을 떠날 수 없었던 시민들은 내셔널 갤러리에서 위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 간의 강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던 장소였다. 시민들뿐만 아니라 버킹엄 궁전을 지키며 런던을 떠날 수 없는 시민과 함께 했던 국왕 조지 6세와 왕비 엘리자베스 역시 내셔널 갤러리에 직접 방문해, 콘서트를 즐기는 시민들과 함께 했다고 한다. 내셔널 갤러리는 전쟁의 위험이 감도는 와중에도 런던의 정중앙 통로에서 사람들을 맞이했다. 런치타임 콘서트는 6년 동안 계속되었다. 1946년 4월 마지막 런치 타임 콘서트가 열릴 때까지. 이제 런치타임 콘서트는 열리지 않지만, 금요일 밤이면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아름다운 선율이 미술관을 채운다. 그리고 금요일은 내셔널 갤러리라 늦게까지 사람들의 발길을 허락하는 요일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소개한 렌드릭 테르 브루겐의 작품 2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내셔널 갤러리 수장품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에 내셔널 갤러리가 구입한 그림이다. 작지만 음악으로 가득 찬 25번 방을 잠깐 들려보는 것도 내셔널 갤러리를 특별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내셔널 갤러리의 가장 큰 장점은 2300점이 넘는 컬렉션을 무료로 관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박물관이 열렸을 때부터 고수한 정책이라는 점에 놀랐다. 내셔널 갤러리는 처음부터 예술가나 부유층에게만 열린 장소가 아니라 수많은 대중들에게 공개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내셔널 갤러리를 추진했던 영국 하원은 "하인이나 보모가 없는 가난한 이들의 입장이 불가능할 것"을 염려해 어린이의 입장도 허락했을 만큼 대중을 위한 미술관이란 설립 이념을 명확히 했다. 세계 최고의 명화 컬렉션과 커다란 미술관 건물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비용이 들 텐데. 무료로 관람하게 하는 건 관람객으로써 반가운 이야기이지만 박물관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내셔널 갤러리를 운영하는데, 수많은 비용이 든다. 많은 비용이 영국의 문화 정책과 세금 그리고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부로 충당되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 수준의 컬렉션이라면 입장료로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1857년 국회 위원회에 진술된 내셔널 갤러리의 목표에 대한 언급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림의 존재 가치는 수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고귀한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수단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
"훌륭한 예술 작품을 특정 소수만이 소유하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차별 없이 감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라는 철학이 우선시되기에 무료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념은 영국의 수많은 국립 미술관과 박물관에도 똑같이 적용하는 정책이다. 영국의 문화 정책 슬로건이 'Great art for everyone'인 이유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내셔널 갤러리는 무료입장 외에 장애인들의 편안한 관람을 위한 노력, 영구 소장품의 디지털 자료화, 다양한 방식의 강의와 투어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멋진 철학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내셔널 갤러리에 방문한 사람들은 기꺼이 기부한다. 그래서일까.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품의 60% 이상이 미술을 사랑하는 일반 시민들의 기부와 기증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내셔널 갤러리가 이와 같은 철학을 고수하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소식을 듣기 어려울 것이다.
내셔널 갤러리의 정책과 같은 생각을 가진 화가의 작품 앞에 섰다. 내셔널 갤러리 34번 방. 조셉 말러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의 대표작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1838-1839)>(이하 '전함 테메레르호') 앞에.
윌리엄 터너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화가였다. 어렸을 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줄 알았고, 적절한 때에 좋은 스승을 만나는 행운까지 얻었다. 덕분에 14살에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이듬해 왕립 아카데미의 여름 전시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고, 그리고 10여 년 후 학생에서 최연소 회원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당대에 그림을 높이 평가받기 쉽지 않았는데, 터너는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자 원근법 교수로 활약했다. 그림을 잘 그렸을 뿐 아니라 그는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고 저작권 관리하는데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12살 때부터 코벤트 가든에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이발소에서 그림을 전시하고 팔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개인적인 회랑을 가지고 있을 만큼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이를 가치 있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화가로써 탁월한 재능과 이를 관리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는 건강하기까지 했다. 19세기 런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던 두 차례의 콜레라에도 건강을 지켰고, 73세까지 그림을 그렸다. 노년에 그가 그린 그림은 젊었을 때 그림보다 더 높이 평가받았다. 내셔널 갤러리 34번 방을 빛내고 있는 <전함 테메레르> 역시 그가 64세 때 발표한 작품이다. 이처럼 모든 걸 다 가진 터너가 이루지 못한 소망이 있다면, 그건 그의 유언일 것이다.
"내 특별한 지시들이, 무엇보다 내 그림을 같은 장소에 보관하고 무료로 공개해야 한다는 의미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재산과 완성작들을 영국 국민에게 기증한다고 했다. 자신의 재산으로 가난한 화가를 돕는 재단을 세우고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미술관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유언을 두고 가족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상속인들이 그의 재산을 나눠 가지며 그의 유언은 그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다행히 그의 작품은 그의 뜻대로 영국 국민에게 전해졌는데 그 규모가 "550점의 유화, 약 2,000점의 수채화, 약 3만 점의 스케치와 함께 스케치북 300여 개"였다. 엄청난 규모의 그의 그림을 아쉽게도 한 곳에 전시하지는 못했다. 대신 테이트 브리튼에 '터너 컬렉션'으로 영국은 터너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1984년부터 테이트 브리튼은 터너상을 제정해 매년 한 해 동안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나 미술활동을 보여준 50세 미만의 영국 미술가에게 상을 주고 있다. 이렇게 그의 유훈은 있는 그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의 바람이 어느 정도 이뤄졌으니 그의 소망 대부분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가진 터너의 일생에 놀랐지만 가장 놀란 점은 자신의 일관성 있는 그림을 한 곳에 관람할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는 점과 그 특징을 살려 영국 국민을 자신의 그림을 감상할 관람객으로 두는 그의 배포였다.
이렇게 똑 부러지고 당당한 터너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2016년 4월에 2020년부터는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에 이어 20파운드의 주인공으로 결정 나서 이은 지,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 한 명이어서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34번 방의 인기 작품은 단연 <전함 테메레르호>였다. 터너가 지폐의 주인공이 되기 전부터 <전함 테메레르호>에 대한 영국인의 사랑은 대단했다. "1995년 BBC 라디오 4와 내셔널 갤러리가 공동으로 조사한 '영국이 소장 중인 가장 위대한 그림'을 뽑는 설문조사에서 1위로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호>를 뽑았다."라고 한다. 또 갤러리 앞 광장의 이름을 딴 '트라팔가 해전'을 상징하는 배인 만큼, 테이트 브리튼의 터너 컬렉션에 내줄 수 없는 내셔널 갤러리의 대표작 중 하나였다.
하지만 터너의 그림은 테메레르호는 트라팔가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전함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초라하고, 작게 느껴진다. 그림의 원제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에 그 모습의 이유를 알 수 있다.
테메레르 호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큰 활약을 펼쳤던 전함이다. 하지만 터너가 이 작품을 발표한 건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1839년이다. 그리고 이때 테메레르 호는 전함으로 수명을 다해 증기선으로 개조하기로 결정되었다. 터너는 전함이 쉬어니스에서 로터히드로 마지막 항해를 떠났다는 소식을 신문을 듣고,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전해진다. 토마스 캠벨의 시 「그대 영국의 선원이여」의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던 깃발, 이제 더 이상 전함의 것이 아니네'를 인용해 로열 아카데미에 위 그림을 전시했다.
60대의 터너는 전함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리고 이 그림에 무엇을 담고 싶었을까. 터너는 자신이 젊었을 때, 자신처럼 대활약했던 전함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년의 생이 겹쳐졌을 것이다. 처음에 그림을 보았을 때, 강열한 태양빛에 일몰이 아니라 일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증기선으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전함을 그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강열한 태양에 가려진 달을 발견한 순간 생각은 바뀌었다. 노을 아래 있는 마지막 전함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이제는 지나온 역사가 된 테메레르호를 한낮의 태양빛 아래가 아니라 해질 무렵 노을에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뒤에 불타오르는 석양에 시선일 빼앗겨, 주인공인 함대의 모습은 흐릿하다. 하지만 태양에서 시선을 옮겨 전함을 보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예인선에 끌려 들어오는 모습이다. 함대의 과거의 명성과 사뭇 다르다.
큐레이터 엄미나 씨는 "조국을 위해 헌신했고 영웅 대접을 받았던 전함 테메레르가 시간이 흘러, 쓸쓸하게 철거작업을 위해 이동하는 모습"을 통해 "인생의 찬란한 순간은 한때이며 시간이 지나면 저무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이왕이면 어둑한 밤에 예인선에 끌려 들어오는 전함의 모습을 그렸다면 좀 더 메시지가 확실하게 다가올 텐데 싶었다. 예인선에 끌려 들어오는 전함의 모습에 주목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터너는 석양이 불타오른 때를 포착해 화폭에 옮겼다. 담담하다 못해, 눈부시게 아름답게 말이다. 왜 그랬을까.
그림 속 배에는 98개의 포문을 가지고 유럽 바다 전역에서 활약했던 군함의 영광스러운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터너가 완성했을 무렵 그 군함조차 해체되어 그 자취를 감추었다. 30여 년의 시간 동안 배의 위상은 달라져 쓸쓸한 마지막에 이르렀지만, 초라하게 그림을 완성하지 않은 건 전함 테메레르에 자신을 투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60대에 들어서 터너는 언젠가 화가로서 마지막을 맞이할 자신을 테메레르를 보며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생각이 그림에 녹아든 건 아닐까 싶다. 예인선에 끌려가는 테메레르 군함과 같은 마지막을 맞이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황홀한 노을에 '아름답게' 표현된 <전함 테메레르>처럼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게 아닐까 싶었다. 세월을 맞아 낡은 전함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지 않은 그의 태도가 꽤나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림을 보았다.
터너는 이 그림을 "나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부를 정도로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두고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남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철학적 메시지와 높은 완성도에 만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당대 높이 평가받던 그림들과 달리 거친 붓터치로 흐리게 그렸음에도 높이 평가받은 것에 대한 자부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터너가 자신을 투영한 그림이라 보물로 여긴 듯싶다.
참고 문헌
내셔널 갤러리 홈페이지 https://www.nationalgalleryimages.co.uk
당신이 내셔널 갤러리에서 꼭 봐야 할 그림들, 에리카 랭퀴르, 사회평론 (2009)
런던 미술관 산책, 전원경, 시공아트 (2010)
트라팔가 광장 앞 그 미술관, 엄미나, 시그니처 북스 (2017)
0부터 100까지 런던 101, 최은숙·지니최, 소소북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