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말이 되자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직 가을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여름이 홀연히 가버린 듯해서 조금 아쉽기도 하다. 바람이 시원해진다는 것은 뛰기 좋은 날씨라는 것이다. 마라톤 대회들도 매주 주말에 열릴 예정이다. 서울 시내 교통 통제를 하는 브랜드 대회들, 한강변을 달리는 작은 대회들, 그리고 지방 곳곳에서 열리는 특색 있는 대회들. 대회는 차고 넘친다.
9월의 첫 대회로 아디다스 마이런을 신청했다. 10km에 5만원이면 조금 비싼 감이 있다. 그래도 서울 시내를 뛸 것으로 예상되었고, 오랜만에 젊은이들이 많이 나가는 브랜드 대회에 나가고 싶었다.
좌-오늘의 착장, 우-기존 아디다스 티셔츠와 사이즈 비교
대회 기념품은 보통 사이즈보다 큰 투박한 에코백과 흰색 티셔츠였다. 저 에코백은 들고 다닐 일이 없겠구나 했는데, 환경보호의 일환으로 짐 보관용 일회용 비닐을 지급하지 않으니 지급한 에코백을 들고 오라고 했다. 그럼 대회날 한번 들고나가서 바람은 쏘이겠군 싶었다.
티셔츠는 그동안 아디다스 티셔츠가 나오는 대회들에 나갔을 때 받은 게 90 사이즈가 잘 맞아서 사이즈 조견표를 보지도 않고 90 사이즈로 선택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품이 컸다. 저 품정도면 당연히 현장 교환을 했을 것인데, 어깨 길이는 또 기존 것과 같았다. 어깨가 좁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깨깡패까지는 아닌데. 어깨가 불편하면 뛰기가 힘들기 때문에 사이즈 교환 없이 넉넉하게 입기로 했다.
나는 평소 마라톤 대회에 나갈 때 적어도 뛰기 2시간 전에 아침으로 커피 한잔과 단팥빵을 먹는다. 티셔츠는 얇은 뉴발란스 러닝 티셔츠를 3벌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을 돌려 입는다. 쇼츠 역시 뉴발란스다. 양말은 타비오의 발가락 양말이나 뉴발란스의 얇은 러닝 양말을 신는다. 모자 역시 뉴발란스 러닝캡을 쓰다가 최근에 나이키 러닝캡을 하나 들여서 번갈아가며 쓴다. 고글은 루디프로젝트의 것을 두 개 번갈아 낀다. 풀이나 하프면 가볍고 얼굴에 착 붙는 라이돈, 10km나 하프면 멋부리기용으로 알이 큰 스핀호크를 택한다. 러닝화는 아디다스 아디오스 라인 중 하나를 신고, 가민235 시계를 찬다. 대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오늘은 세 가지를 하지 않았다. 뛰기 한 시간 반 전에 닭가슴살과 이파리들이 든 곡물 샌드위치를 먹었다. 뉴발란스 러닝 티셔츠 대신 대회 티셔츠를 입었다. 모자를 쓰지 않았다. 피치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높은 심박수와 급격한 페이스 저하
A그룹을 비집고 들어가 꽤 선두에서 출발했다. 1km를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요리조리 왔다 갔다 하니 사람들과 간격을 두고 달릴 수 있었다. 2km까지 속도를 조금 올려서 달렸는데, 2km를 넘어가니 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고작 2km 뛰었는데? 싶었지만 숨도 힘들고, 먹은 게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숨 힘든거야 10km 뛸 때는 당연한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먹은 게 위장 속에서 출렁 거리는 느낌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기록은 진즉에 포기하고, 어서 이 레이스가 끝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뛰었다. 내가 지나온 사람들이 나를 다시 지나쳐 가는 모습을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코스는 여의도공원을 출발해서 양화대교를 건너 마포구청을 지나 월드컵경기장으로 골인하는 코스였다. 다른 대회들도 많이 택하는 코스와 겹치는 구간이 있었다.저기를 돌면 내리막이니 숨 골라가야지 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기도 하고, 저 멀리 보이는 오르막이 얼마나 급한 경사인지 알고 있어 그때부터 숨 막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양화대교를 건넌 게 오늘이 처음이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길게 느껴졌다. 실제로 긴가 싶어 길이를 찾아보니 1053m였다. 잠실대교보다 200m 정도나 짧았다. 역시 기분 탓이었다.
아무래도 아침에 늦게 먹은 닭가슴살 샌드위치 때문이 아니겠는가. 목 좁고 어깨 길이 짧은데 품은 큰 대회 티셔츠도 잘못했다. 햇빛을 가려주지 못한 모자의 부재도 한 몫했다. 이렇게 정신승리를 해본다. 그래도 맑은 하늘 아래 아침 일찍부터 서울 시내를 뛸 수 있어서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뛰고 나서 커피 한잔에 수다수다한 시간을 보내고는 사우나를 다녀왔다. 빨래까지 널었더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다. 오늘 하루 참 잘 보냈다.
덧) 뛰었으니까 괜찮다며 간식으로 월드콘을 먹으려다가 아침에 마신 바닐라라떼로 오늘치 설탕은 이미 초과한듯해서 보성녹차와 하루견과 한봉으로 마무리했다. 지난번에 러너스 월드를 읽고 설탕 줄여야지 라고 썼던 게 이렇게 발목을 잡는다. 좋은 발목 잡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