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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토너 Oct 20. 2019

마라톤대회에는 달리기만 있는 게 아니다

응원하러 춘천행

마라톤 대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메인 무대인 주로를 달리는 사람들, 주로에서 5km마다 급수와 간식을 책임지는 사람들, 그리고 주로 변에서 응원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사람들.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 마라톤 대회에서의 나는 항상 주로를 달리는 사람이었다. 러닝 동호회 활동을 하던 시절, 대회를 나가면 내 이름을 크게 외쳐주는 응원에 힘을 내서 더 스퍼트를 낼 수 있었다. 자신이 참가하지  않는 대회에 시간을 내어 나가서 나를 응원해준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했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하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우리는 다들 나 자신이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남들이 뛰는 것까지 응원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나? 남들이 뛰는 걸 보면 나도 당연히 같이 뛰고 싶어 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왔던 나 역시 응원을 하러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다. 작년 춘천마라톤을 앞두고 욕심을 내서 연습을 하다가 발 뒤꿈치에 실금이 가는 부상이 온 것이다.  회사 마라톤 클럽에서 대회 참가 접수와 대회장을 오가는 왕복 ITX까지 다 예매를 한 상황이었다. 부상이라고 못 간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겠지만, 2015년부터 가을이면 항상 향했던 춘천이었다. 안 간다고 생각하니 매년 치르는 연중행사를 건너뛰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서 하는 대회도 아니고, 풀코스 응원이 쉽지는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래도 또 춘천이라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매년 응원 없이 각자 치열하게 달리던 회원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보고자 해서 대회장으로 향했다.


남춘천역에서 내려서 대회장으로 향하는 길에 하늘이 흐리긴 했지만 설마 비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대회장에 도착해서 출발 대기 중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못 뛰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비였다. 그러나 장대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자들은 9시 출발 시각이 되자 본인들이 뛰어 내야 할 길로 향했다. 나는 그들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천막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0시가 가까워지자 비가 멎어 들기 시작하기에, 택시를 타고 20km 지점 부근인 신매대교로 이동했다.  


신매대교에서 내려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울긋불긋 물든 단풍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냥 한 색으로 붉은 것도 아니고, 서로 자기 색깔이 더 멋지다는 듯 각자의 붉음을 뽐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지난해까지 춘천의 단풍들을 떠올려봤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뛰느라,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느라 주위를 살필 여력이 없었을 탓이다. 내가 뛰지 않아서인지 단풍의 모습이 강렬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동안 이렇게 멋진 곳을 내가 뛰었구나,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고 다음에 뛸 때는 꼭 이 멋진 단풍의 모습을 보면서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출발 전에 동호회원분의 파워젤을 받아 20km 지점에서 전달하기로 했다. 나는 풀코스를 뛸 때 파워젤 3개를 먹는데, 파워젤 전달을 해준다고 해도 내가 세 개를 다 들고뛰었다. 남을 믿지 못한 탓이다. 이걸 내 계획대로 못 먹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신체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겠지만 내가 입을 정신적 타격이 두려웠다. 그런데 이 큰 임무를 선뜻 맡기다니, 반드시 제대로 전달해야지 라며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파워젤을 맡긴 주자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름 배려한답시고 파워젤 입구를 뜯어 주자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만약 내가 들고뛴 상태였다면 멈추지 않고 뜯어먹으면서 갔을 텐데, 주자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 뜯어준 것 까지는 좋았는데 내가 가만히 서있었구나. 나도 주자 옆에서 뛰면서 전달해 줬어야 했다. 응원이나 파워젤 전달이나 해본 사람이 잘할 텐데 응원 초심자의 실수였다. 그래도 나중에 먹기 좋게 까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으니, 나쁘지 않았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파워젤 전달 임무 완수 후에도 클럽 회원분들이 하나둘씩 지나갔다. 차장님, 팀장님들의 이름을 마구마구 불렀다. 비에 흠뻑 젖은 채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내 얼굴에도 자동적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외치는 파이팅 한마디가 그들의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했길 바랐다.

20km 지점에서 응원을 마무리하고는 38km 지점으로 이동했다. 골인을 앞두고 4km는 매우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많은 동호회 사람들이 자리를 차리고 힘을 주어 응원을 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들이 테이블을 깔고 그 위에 차린 것들을 보고 나서야 콜라 한병이라도 사 왔어야 했는데 싶었다. 하지만 매점은 저 길 건너편에 있어 갈 수가 없어 또다시 맨몸 응원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멎은 줄 알았던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를 흠뻑 머금은 신발이 얼마나 무거울까. 땀과 비가 뒤섞여 흐르는 물들이 얼마나 시야를 가릴까. 그냥 뛰어도 힘든 걸 아니까 이렇게 사정없이 내리는 비가 원통스럽기만 했다. 나는 뛰지도 않고 우비를 입고 있는데도 골인지로 걸어가는 4km가 천리길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대회가 끝나고, 매년 가는 막국수 집에서 뒤풀이 자리를 가졌다. 같은 장소에서 각자의 레이스를 펼친 이들의 이야기를 그 어느 때보다 귀 기울여 들었다. 악천후에서 멋지게 뛰어낸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들의 레이스를 극히 일부분이라도 지켜봤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뛰는 게 중요하고 내 기록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날은 나와 몇 년을 함께 달려온 사람들이 어떤 얼굴로 달리는 지를 볼 수 있었고, 그들에게 아주 조그만 힘이라도 될 수 있었던 하루였다. 나 자신뿐 아니라 남이 달리는 것 역시 소중하고 대단하고 벅찬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 응원을 하러 나오는 사람들은 이런 기분 때문에 나오는 것일까. 그제야 그 기분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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