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니 7시 반이었다. 남춘천역에 내릴 예정 시각이 7시 반이었는데 그 시각에 잠에서 깬 것이다. 한 달 전의 대회 때도 같은 일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뛰는 것을 포기했었다. 하지만 이건 내가 그렇게도 기다려왔던 '춘마'가 아니던가. 이내 냉정을 되찾고 시간을 계산해보니 출발시간인 9시보다 40분 정도 늦은 시간에는 출발선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회장에 간신히 도착해서는 그 와중에 간이화장실은 더럽다고 조금 더 큰 임시화장실에 가서 줄을 서는 여유까지 부렸다. 아홉 번째 풀코스에 임하는 주자의 여유로움이었을까. 아마도 아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무심함이었을 것이다.
출발선까지 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준비운동을 하는 사치까지 부리지는 못한 채 바로 출발했다. 시계를 보니 9시 50분이었다. 원래라면 이미 출발한 사람들, 함께 출발한 사람들과 북적북적하게 뛰어갔을 그 넓은 길을 홀로 뛰기 시작했다. 다르게 생각하니 영광스럽기도 했다. 내가 언제 춘천마라톤 풀코스 길을 단독으로 뛰어보겠는가. 엘리트 선수들도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뛰는 것이지 혼자 뛰는 경험은 하지 못할 것이다.
대회를 앞두고 회사 사람들과 친구들이 이번에도 춘천 마라톤에 나가냐고 물어왔다. 목표가 몇 시간이냐는 말에는 그저 완주하는 게 목표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sub4(풀코스를 4시간 안에 완주하는 것)를 외치고 있었다. sub4를 하겠다며 난리 치던 때는 대회를 앞두고 월 100km 정도 뛰었었는데, 이번 달에는 40km를 겨우 채운 상태였다. 그래도 목표는 높아야 제맛이 아니겠는가. 30km까지 sub4 페이스로 밀고, 그 뒤에는 몸이 받쳐주면 그대로 가고, 안되면 말자. 조금 퍼지더라도 4시간 초반대는 되겠지. 일단 해보자.
그렇게 초반부에 홀로 뛰며 머릿속으로 레이스 전략과 마음가짐을 정비했다. 3km쯤 되자 풀코스 후미 주자들을 지나쳤다. 오랜 시간 뛰는 게 더 힘들 텐데. 그들을 지나치며 화이팅을 외쳐주려다가 왠지 초반부터 그러면 더 기운 빠질까봐 하지 못했다. 4km가 되니 하프코스 주자들이 지나갔고 그때부터 매년 느껴오던 춘마의 느낌이 물씬 나기 시작했다. 아직 단풍이 들기 전이어서 울긋불긋한 화려한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넓고 깊은 호수는 매번 봐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하늘은 '가을 하늘'의 특유의 푸른 느낌은 적었지만, 고글을 낀 덕에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보였다.
하프 지점인 신매대교에 도착했다. 생각해 보면 2시간 내내 한 동작을 한 것인데, 그게 금방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바로 대회빨인가. '아이고, 이만큼을 한 번 더 뛰어야 되네'가 아닌, '이제 절반도 안 남았네. 이 정도면 금방 뛰겠다'는 생각을 했다. 곧 30km가 넘어가면서 감히 그런 생각을 했던 과거의 나에게 혼쭐을 내고 싶어 졌지만.
30km까지는 sub4 페이스를 여유 있게 유지했다. 그래서 계속 사람들을 추월하며 달렸다. 그러다 30km가 지나자 한순간에 다리가 무거워졌다. 속도는 점점 줄기 시작했고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추월했다고 해서 이겼다거나, 추월당했다고 해서 진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각자의 시간 목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어쨌든 결승점이 아닌가.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김연수 작가의 말을 떠올릴 뿐이었다.
뛸 때마다 느끼지만 초반 10km와 후반 10km는 체감하는 힘듦이 10배는 되는 것 같다. 초반부에는 예상 시간부터 시작해서 일상의 고민이나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뛰었다. 몸이 힘들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다. 30km가 넘어가고 다리가 벽돌처럼 굳는 느낌이 나기 시작하자 오로지 '힘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눈 앞에 보이는 33km, 34km라는 숫자가 그냥 다 같아 보였다. 그러다 40km 지점이 되면 어째서 2km나 더 남은 것이냐며, 40km면 족하지 않냐며 마라톤 자체를 비난도 했다. 그러나 곧 맞이하는 결승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내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박수갈채의 힘으로 다리를 조금 더 높이 들어 올려보았다. 드디어 결승점을 통과했다. 기록은 4시간 08분 47초. sub4는 못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기록이다.
비로소 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부상 없이 무사히 뛸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주로에서 배번호에 붙은 이름을 보고 크게 외쳐준 분들 덕에 중간중간 힘을 낼 수 있었다. 비도 안 왔고, 덥지도 않아 시원한 공기 속에 아득한 의암호를 보며 기분 좋게 뛸 수 있었다. 7시 반에 일어났는데도 춘천까지 무사히 와서 뛸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뛰는 동안에는 몰랐지만 네 시간 넘게 쉬지 않고 두 다리로 뛰어 낸 나 자신이 너무 장하고 기특했다. 평소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 않은데 풀코스 한 번 뛰면 오만 게 다 감사하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재지 않고 칭찬하고 감탄하는 날은 딱 이날뿐인 것 같다. 이 맛에 풀코스 뛰나 싶다.
이번 대회의 골인지점 영상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었다. 화면 구석에서부터 달려오는 내 모습이 보였다. 뛰어오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기념으로 가지고 있고 싶어서 편집해서 저장해뒀다. 늦은 밤 가족 단톡 방에도 올렸는데 내 의도와는 다른 엄마의 반응에 콧등이 시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