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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토너 Nov 11. 2019

저 원래 까만데요?

"주말에 뛰고 왔어? 많이 탔네"

라는 소리를 간혹 듣는다. 진짜 뛰고 왔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나는 원래 피부가 까만 편이다. 어릴 적 나의 까만 피부를 보고는 증조할머니께서 엄마에게 한 말씀하셨단다. “괘안타, 크면 하얘질끼다”


크면 하얘진다는 논리는 어디서 왔을까. 살이 팽창하면서 응축하고 있던 짙은색이 옅어진다고 믿으셨던 걸까.  햇빛을 덜 받으면 더 까매지지는 않겠지만 하얘질 리는 없을 터다. 특별히 해를 피하면서 살아오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성인이 된 지금도 까만 피부를 유지하고 있는 건 매한가지다. 어릴 때는 꽤나 스트레스였다. 어린아이들은 친구들의 사소한 특징을 귀신같이 붙잡아 놀리는 재주가 있다. 당시에는 앞니까지 돌출형이었다. 시대를 풍미하던 축구 스타 호나우지뉴(a.k.a. 호나우딩요)의 이름을 따와 ‘딩요’라고 까지 불러댔다. 아빠랑 눈코입 다 닮은 건 그렇다 치고 까만 피부까지 물려받을 필요가 있나, 원망스러운 10대 시절을 보냈다. 20대가 되어 화장을 하면서 한 꺼풀 정도는 피부를 밝힐 수 있었고 교정으로 가지런한 치아도 갖게 되었다. 더 이상 딩요라고 부르는 아이들도 주변에 없었다. 점점 까만 피부에 대한 콤플렉스는 희미해져 갔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밤에 뛸 때도 있지만 대개는 해가 떠 있는 동안 달린다. 특히 장시간을 달리는 마라톤대회는 거의 아침에 해가 떠 있을 때 시작한다. 한겨울이 아니고서야 쇼츠에 반팔티셔츠나 민소매를 입고 뛴다. 햇빛에 노출된 신체 면적이 그렇지 않은 부위보다 넓다. 안 그래도 까만 피부라서 어디 하나 벗겨지는 곳 없이 고루고루 잘도 탄다. 쇼츠를 입은 다리 경계가 뚜렷해진 건 이미 오래다. 오늘 샤워를 하고 바디로션을 바르다가 구릿빛 허벅지 아래쪽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에 반해 밝은 위쪽 다리를 보며 문득 빼빼로 같다는 생각을 했다.(마침 오늘이 빼빼로데이다!)


다리는 어차피 시선이 잘 가는 부위가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상반신이었다. 얼굴은 그나마 덕지덕지 발라댄 선크림과 항상 쓰는 모자 때문에 상황이 조금 나았다. 화장으로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팔과 손은 그러지 못했다. 팔뚝에 비해 가늘기 그지없는 손목과 앙상한 손은 한층 까만 피부가 강조되어 보였다. 손발이 차서 조금만 쌀쌀해지면 바로 장갑을 뛰긴 하지만, 한때는 손 타는 게 싫다는 이유로 여름에도 장갑을 끼곤 했다. 몇 번 그러다가 갑갑하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자괴감이 들어 벗어버렸다. 오늘도 손 더 까매지겠다며 체념하고 뛰었다. 겨우 까만 피부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나 했는데, 살갗을 더 태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주 보기 좋게.  


그런데 오히려 손을 태우지 않겠다며 꼈던 장갑을 벗고 뛰니 해방감이 느껴졌다. 손이 느꼈던 실질적인 갑갑함과 마음 한구석의 불편함을 걷어낸 기분이었다. 좀 타면 어때, 원래 까만데 좀 더 까매진다고 하늘이 두쪽 나나? 애들이 놀릴 때 기분 나빠하던 꼬맹이가 더 이상 아니다. 안 그래도 좋아하는 거 쫓아다니면서 살기 바쁜 내가 피부 타는 것 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잘 탄 손을 앞뒤로 휘두르며 탄탄한 다리로 곳곳을 뛰어다닐 것이다.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타이핑하는 내 손을 보곤 “아이고 하대리 손 탄 거 봐, 작작 뛰어”라는 말에 나는 대꾸한다. “저 원래 까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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