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달리기를 할 때 입고 신는 것 외에 가장 필요한 물건은 시계이다. 1년에 두어 번 10km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즐기는 정도라면 굳이 사지 않아도 좋다. 스마트폰 러닝 앱으로도 기록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핸드폰을 몸에 지니고 뛰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다. 10km 이상의 대회를 뛰는 횟수가 더 많다면 러닝 전용 시계 하나 정도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항상 페이스메이커를 옆에 두고 달리는 것 같은 든든함을 느낄 수 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당연히 달리기 전용 시계가 있는지 몰랐고, 알았어도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나이키 러닝 앱을 다운받아서 앱을 실행하고 뛰면 뛰는 중간에 속도도 확인 가능하고 뛰고 나서 걸린 시간, 구간별 속도, 지도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충분히 내가 뛴 기록을 확인하고 자랑할 수 있었지만 그러던 나 역시 시계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로 2015년 춘천마라톤, 첫 풀코스 출전을 앞두고였다.
내가 샀던 모델은 ‘가민포러너15’ 였다. 시계를 차니 핸드폰을 암밴드에 넣고 뛰면서 계속 휘두르는 동안 팔이 느끼는 무게감이 사라졌다. 팔을 조금 굽혀서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것만으로도 바로 내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뛰고 있는지 확인 가능했다. 페이스와 거리 정보뿐 아니라 GPS를 장착해 위치 정보까지 제공해줬다.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신세계의 황홀함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다. 이 시계에는 다른 기기와의 블루투스 기능이 없었다. 시계에 있는 기록을 PC나 핸드폰의 어플에 전송하려면 반드시 USB로 연결해야 했다. 처음에는 살 때부터 그렇게 했으니 원래 그런가 보다 하며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뛰고 나서 바로 핸드폰으로 기록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니 달리다가 쳐져서 대열에서 이탈한 기분이 들어 전전긍긍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가민포러너15를 채 2년을 쓰지 못하고 조금 더 상위 라인이자 신상품인 ‘가민포러너235’를 샀다. 민트색 시계줄과 시계 원판에 얇게 둘러진 민트색 띠가 과하지 않게 깔맞춤한 느낌이라 세련되어 보였다. 파워를 켜자 눈에 들어온 컬러 액정까지 보고는 과연 15에서 235로의 상승 폭에 걸맞은 비주얼이다 하며 감탄했다. 처음 시계를 차고 달리고 활동 완료 버튼을 누르자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핸드폰으로 그날의 기록이 전송됐다. 블루투스는 정말 혁신적인 기술이라며 신이 나서 이미 사용 중인 사람들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심박수와 케이던스(회전수)까지 알려줬다. 정말 똑똑한 물건일세, 전전긍긍할 시간에 진작 살 걸! 하며 이제야 산 나를 질책할 정도로 새 시계에 푹 빠졌다.
그러다 2018년 춘천마라톤을 앞두고 참여한 러닝 아카데미에서 인터벌 훈련을 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400m를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100m를 회복하는 식으로 반복하는 훈련이었다. 그전까지는 뛰는 동안에 시계를 눌러 구간을 끊어서 속도를 재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400m, 100m마다 속도가 측정되어야 했다. 거리를 봐가면서 400m가 되면 버튼을 눌러 또 새로 100m의 속도를 측정했다. 이를 10km를 뛰는 동안 계속 반복하면 버튼을 40번 눌러야 했다. 뛰면서 거리 봐가면서 버튼을 누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냥 뛰는 것도 아니고 400m 구간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질주를 해야 했다. 그래도 36번까지는 잘 눌렀는데, 37번째에서 400m가 채 되지 못한 거리에서 눌러버려 그 뒤로 꼬이고 말았다. 그렇게 내 첫 인터벌 훈련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훈련이 끝나고 아카데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인터벌 하는 거 너무 어렵더라는 말을 했더니, 황당한 표정으로 시계에 인터벌 기능 있는 거 몰랐냐는 물음이 되돌아왔다. 정말 매뉴얼을 검색해보니 친절하게 설명이 나와있었다. 똑똑한 기계를 내가 안 똑똑하게 써왔을 뿐이었다. 가격도 두배를 더 주고 산 그 혁신적인 시계로 이전에 사용하던 시계와 동일하게 시작 버튼과 종료 버튼만 누르고 기록을 확인했던 것이다. 매뉴얼대로 인터벌 모드를 조작하고 뛰어보았다. 내가 설정한 구간대로 끊어서 속도를 측정해줬다. 나는 그저 인터벌 모드를 눌러 숫자 몇 개만 눌러뒀을 뿐인데, 자동으로 거리마다 속도를 측정해주다니. 처음에 이 시계를 사고 느꼈던 감동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
월 200km씩 뛰는 사람들은 시계줄이 삭아서 교체용 시계줄을 몇 개씩 사두는 모양이다. 그에 반해 산지 2년이 지난 지금도 내 시계의 시계줄은 탱탱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년 동안 각종 기능을 붙이고 무게도 한결 가벼워진 시계들이 나왔다. 조금 더 가볍고 화사한 색상에 노래까지 담아서 들을 수 있는 모델에 눈길이 간다. 하지만 작년에 기본으로 제공하는 기능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몸고생 하던 나를 떠올린다. 아직 건사한 시계줄이 눈에 들어온다. 세월은 흘렀지만 나에게 충분히 똑똑하고 튼실한 이 시계를 아직은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