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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토너 Dec 08. 2019

이번 생에는 어려울 것 같아

트레일 러닝 도전기

나는 겁이 많은 편이다. 어느 정도냐면, 어릴 때 추운 겨울날 손에 율무차를 들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 무릎 정도 높이의 작은 개와 맞닥뜨렸던 적이 있다. 어쩔 줄 모르던 나는 개와 마주한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그 율무차를 제자리에 내려두고 한참을 돌아서 집에 도착했다. 이웃한 도시에 놀러 가면 평소에 못 보던 비둘기에 식겁해서 도망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닷가 출신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물도 무서워했다. 산도 오르기는 잘 올라놓고 내려올 때는 미끄러질까 봐 부들부들 떨면서 내려오느라 제일 늦게 내려왔다. 대학교 때는 2박 3일 동안 밥 먹고 스키만 탄 적이 있는데, 혹여나 넘어질세라 몸에 힘을 잔뜩 준 탓에 근육통으로 일주일을 앓았다.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자전거도 병행했었는데 자전거며 옷이며 다 사놓고 겨우 2년을 타고 말았다. 워낙 조심해서 탄 덕인지 낙차 한 적도, 경미한 접촉사고 한 번 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고로 수술대에 오르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렀다는 사고사례를 듣고는 무서워서 계속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것저것 시도는 많이 해봤지만 무섭다는 이유로 금방 포기하고 말았던 나에게 달리기는 계속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달리기는 몸이 힘들 뿐이지 무서울 것은 없다. 장비에 의존하지도 않고 오로지 내 두 발로 뛰어낸다. 마라톤 대회의 주로가 차도라면 도로 통제를 하고, 그게 아닐 경우에는 차가 다니지 않는 한강변이나 하천을 뛴다. 혼자 달릴 때에도 안전하고 뛰기 좋은 곳을 찾아가 뛴다. 속도를 낸다고 한들 위협을 가할 정도는 아니어서 추돌사고의 위험도 없다. 나 같은 겁쟁이에게 이만한 운동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외가 있었으니 포장되지 않은 산길, 초원, 언덕을 자유롭게 달리는 ‘트레일 러닝’이었다.


2017년에는 동호회에 가입해서 사람들과 함께 뛰고 달리기 얘기를 하는 것에 빠졌었다. 그러다 보니 트레일 러닝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트레일 러닝에 입문하고서는 산만 뛰어다니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했다. 이 사람들이 풀코스 뛰는 걸로는 성이 안차나? 무서운 사람들이구만.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호기심이 일었다. 관심을 보이자 이내 같이 뛰자는 제의를 해왔다. 고민에 빠졌다. 포장된 도로가 아닌 흙길을 뛸 때 발바닥에 전해질 촉감이 궁금했다. 평평한 지면을 딛고 앞을 향해서만 나아가는 달리기가 아닌 시시각각 변하는 방향과 경사를 마주하며 달리는 기분은 어떨까? 그런데 나는 산을 걸어 내려올 때도 부들부들 떠는 사람이 아니던가. 갈까 말까를 수도 없이 반복하다가 가겠다고 했다. 일단 해보고 영 무서우면 다음부턴 안 하면 되지 라는 생각이었다. 첫 도전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이 사이좋게 공존한 일주일을 보냈다.


처음으로 산길을 뛰는 것이니 동네 뒷산 정도이려나 했는데 웬걸 북한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제외하고는 835.6m의 고도를 자랑하는 북한산 정상에 뛰어 올라갔다가 내려오기에 충분한 사람들이었다. 이날의 코스는 초심자인 나를 고려해서 야트막한 곳을 한 바퀴 돌아서 오는 것으로 정해졌다. 초반에 오르는 길은 사뿐사뿐하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오르는 길에도 오르막 내리막 경사가 반복되는 것이 산이 아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급격한 내리막 구간이 짜잔 하고 나타났다. 발걸음에 분절 현상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내 뒤로 정체현상이 나타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한여름의 더운 날씨에 달리느라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에 질 수 없다는 듯이 흐르는 식은땀이 가세해서 그야말로 육수를 쏟아내고 있었다. 뒷사람이 괜찮다고 몸에 너무 힘주지 말고, 지면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가볍게 뛰어내려 가면 된다고 했다. 내 머리는 분명 당신의 말을 믿고도 남았지만, 내 다리가 당신의 말을 따르지 못했다. 결국 그 날 목표했던 코스를 채 채우지 못하고 내려와 못 채운만큼 고기와 술로 배를 채웠다.


다시는 트레일 러닝 하나 봐라 했던 나는 다음 달에 동호회 사람들과 제주도로 향했다. 2박 3일의 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둘째 날의 한라산 등반이었다. 전날의 알찬 관광과 밤늦게까지 마셔댄 술은 꿈에서였던 듯, 다음날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42.195km를 4시간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답게 우리 정말 잘 오른다며 하하호호 웃으며  올랐다. 10번 오르면 5번 보기도 힘들다는 백록담을 두 눈에 담고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지겨움과 얼른 내려가서 흑돼지를 먹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이 이제부터 트레일 러닝이라면서 뛰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몇 발짝 따라 뛰다가 ‘난 틀렸어 먼저 가’를 시전했다. 뛰는 것만이 아니라 걷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폴짝폴짝 뛰어 내려가는 사람들이 이따금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며 한 마디씩 했다. 허리를 숙이고 두 손을 앞으로 엉거주춤 내민 게 영락없이 할머니 같다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무서워 죽겠다고 징징거럈다. 예정에 없던 트레일 러닝으로 몸과 정신이 쇠약해진 나에게 흑돼지를 양껏 하사했다.   


정말로 더 이상은 내 인생에 산에서 달리기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대로 끝내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다음 해 폭염특보가 내린 여름날, 독립문의 안산에서 트레일 러닝 클래스가 열린다는 것을 보고 신청했다. 높지도 않고 길도 험하지 않아 초보자들이 달리기 좋은 산이라고 했다. 오르막은 무리 없이 잘 따라갔다. 하지만 얕은 산도 산이었다. 이내 겁쟁이의 본성이 나타났다. 좁은 구간에서는 발을 헛디뎌 옆으로 떨어질까 봐, 나무뿌리가 그대로 노출된 땅은 걸려 넘어질까 봐, 옅은 내리막에서는 미끄러질까 봐 주춤주춤 하며 뛰기를 반복했다. 두려움에 가득 찬 마음 한편에 열등감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뛰어가는데, 나는 왜 무섭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걸까. 풀코스 마라톤을 잘 뛰어낸 것처럼 산도 폴짝폴짝 잘 뛰고 싶은데. 하나를 해도 잘하고 싶은 내 욕심이 트레일 러닝에서는 충족되지 않았다. 오늘이 산에서의 마지막 달리기다. 다짐하며 겁에 질린 발을 무겁게 옮겼다.


그해 늦가을에 다시 북한산을 찾았다. 트레일 러닝이 아닌 등산을 위해서였다. 경량 패딩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등산화를 신은 채로 단풍도 구경하고 나무 생김새도 관찰하면서 편안한 호흡으로 올랐다. 내려올 때는 등산스틱 덕에 덜 후들거리면서 내려올 수 있었다. 울퉁불퉁하고 경사진 곳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곳을 달릴 때만큼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겁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에게는 평탄한 지면을 달리는 게 딱 맞다. 트레일 러닝은 도전정신을 발휘했다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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