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용 감성>
인간을 포함해 모든 동물의 생존 본능은 대단하다. 생존 본능은 지구상에 생명을 존속하게 한 가장 근본적이면서 강렬한 욕구다. 나이 드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지식과 경험을 많이 쌓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소위 꼰대에게 본인의 삶은 본인이 옳다는 증거 그 자체다.
꼰대들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일이 많은 이 녹록지 않은 세상에서 서른을 넘도록 생존한 것 자체가 일종의 성취라고 치부한다. 어쩌면 꼰대가 나누고자 하는 것은 이런 생존 지식일 수 있다. 꼰대에게 실패는 우연이며 성공은 실력이다. 어찌 보면 꼰대는 사람을 밟고 올라서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돈, 명예, 지식, 도덕성까지 그들은 모든 것을 권력처럼 휘두른다. 심지어 나이를 포함해서 말이다.
젊은 꼰대 잠 깨어 오라
꼰대는 원래 나이 많은 남성을 가리키는 비속어였으나, 지금은 남녀 불문하고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다.
요즘은 ‘젊은 꼰대’라는 말이 종종 보인다. 장난감 대신 기관총을 손에 쥔 어느 아프리카 소년처럼 젊은 꼰대는 어린 시절부터 잔혹한 경쟁을 뚫고 생존했다. 젊은 꼰대는 젊음의 패기와 나름의 생존 지식으로 중무장한 역전의 용사다. 남부끄럽지 않은 대학과 바늘구멍보다 좁은 취업 문을 통과했기에 젊은 꼰대는 거침이 없다. 대체로 젊은 꼰대가 늙은 꼰대보다 해롭다. 젊은 꼰대와 달리 늙은 꼰대는 월급이라도 주니까.
꼰대는 폭력이다
꼰대의 가장 큰 문제는 폭력성이다. 꼰대는 육체가 아닌 영혼과 자존감에 상처를 입힌다. 한 친구의 이야기다. 수영을 마치고 몸을 씻는데 옆자리의 중년 여성이 ‘그런 수영복 입으면 수영 잘 안 되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분 좋게 수영하고 나서 갑자기 수영복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 돼버린 친구는 ‘네?’라고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그 사람은 ‘요즘 젊은것들은 말해도 듣지를 않아’라고 중얼거리며 나갔다고 한다.
일상에서 가끔 부딪히는 꼰대의 한마디는 소확통이다. 다시 말해, 작지만 확실한 통증이다. 소위 ‘꼰대질’을 당하는 것은 접촉 사고와 비슷하다. 본인이 아무리 조심해도 옆에서 차선을 넘어오면 부딪힐 수밖에 없다. 접촉 사고와 다른 점이라면 가해자가 당당하다는 점이다. 버스에 앉아 있다가 등산 가방이나 장바구니에 머리를 부딪혀본 사람은 알 것이다. 피해받은 사람보다 피해 준 사람이 초연할 때가 많다.
너 좋으라고 하는 말 아니야
“너 좋으라고 하는 말이야.”
가해자가 당당해질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이다. 처음 사냥을 나서는 후배에게 생존 지식을 전하는 것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능이자 선배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 본인의 생존 지식을 나누려는 의무감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 의무를 권리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바라지 않은 충고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감정적 비난으로 들리기 쉽다.
나도 꼰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췄다. 한국인이자 남자다. 나이가 들면서 후배도 늘어났다. 대학 후배와 군대 후임을 거쳐 이제 직장 후배까지 생겼다. 이들의 낯선 생각을 만나면 신선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를 때가 더 많다. 특히 그 낯선 생각이 내가 속한 조직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더욱 그렇다.
인간이 문제다
다행히 내가 속한 조직은 타 직종보다 꼰대 문화가 덜한 편이다. 서로의 같음이 물리적으로 결합한 힘보다 서로의 다름이 화학적으로 결합했을 때의 힘을 믿는 직종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꼰대를 피하기에만 급급하던 나도 어느새 잔소리와 포용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다. 생각은 이미 꼰대라는 증거다. 행동마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조직 생활에서 꼰대를 피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사실 피할 수 없기에 고통스럽다. 하지만 집단생활은 인간의 숙명이다. 지구상에 이렇게 광범위한 집단을 만들어 사는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다.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문제일지도….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느냐, 문제인 채로 남겨놓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