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약속이 부담될까

<1인용 감성>

by 재홍



“야, 진짜 미안한데 오늘 야근이라 못 볼 것 같아. 다음에 보자.”

퇴근 30분 전 날아든 친구의 약속 취소 문자. 1년 만에 얼굴이라도 잠깐 볼까 했더니. 취준생 때는 돈 벌고 싶어서 못 봤는데 이제는 돈 버느라 바빠서 못 본다. 문득 아쉬움이 밀려온다. 약속에 대한 해방감과 함께.


약속은 왜 부담될까. 일단 만나면 정말 좋은데 말이다. 비슷한 나이, 비슷한 취향, 비슷한 고민을 하는 오랜 친구를 만나면 직장 동료와 할 수 없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먼저 연애 상황을 보고한 뒤 직장 욕을 하다가 연예인 이야기 또는 군대 이야기로 빠지는 식이다. 만난 지 40분 만에 1년치 이야기를 업데이트하면 서로 스마트폰을 힐끔거린다. 친구의 SNS에는 우리의 만남이 게시되어 있다. 역시 ‘좋아요’를 누르는 게 의리겠지.



박자를 지키고 싶은 마음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송대관 씨가 부른 ‘네 박자’의 가사는 진짜다. 우리네 인생을 노래하는 대중가요의 대부분이 4분의 4박자다. 오죽 많이 쓰이면 Common time, 즉 ‘흔한 박자’라고 불릴까. 4분의 4박자의 매력은 규칙적인 정박에서 오는 안정감이다. 전자 댄스 음악을 생각해보라. 쿵! 쿵! 쿵! 쿵!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박자를 듣다 보면 손발이 알아서 움직인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된다.


출근 퇴근 저녁 수면, 출근 퇴근 저녁 수면. 반복되는 일상에는 4분의 4박자의 아늑함이 담겨 있다. 잠자는 시간까지 지키면서 살아야 하나 싶지만 어김없이 출근 날 아침은 밝아온다. 이렇게 하루하루 정박에 맞춰 살다 보면 약속 같은 엇박자가 낄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야근하거나, 과음하거나, 넷플릭스 드라마 새 시즌이 나온 다음 날은 삶의 박자가 어긋나기 쉽다. 인간에게는 자신만의 박자에서 벗어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를 심리학에서는 ‘현상 유지 편향’이라 부른다.



하던 대로 하고 싶은 마음


현상 유지 편향은 생각의 게으름에서 출발한다. 게을러지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의무가 없거나 또는 관심이 없거나. 의무감에 대해 생각해보면, 아침마다 침대에서 나를 뜯어내는 회사에 대한 의무감에 비해 우정의 의무감은 느슨하다. 친구는 상사와 달리 약속 가지고 연봉을 깎지는 않으니까.


관심은 또 어떤가. 대학 다닐 때는 공강 시간에 밥 먹고, 과제하고, 술 먹는 게 자연스러운 박자였다. 하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질 수밖에 없는 걸까. 요즘의 나는 매일 아침 거울에서 만나는 녀석에게만 오롯이 관심을 쏟는 것 같다.



나를 먼저 찾고 싶은 마음


YOLO(You Only Live Once).

사람은 누구나 단 한 번의 인생을 산다. ‘지구는 둥글다’처럼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 앞서 이 문장을 한 번씩 되뇌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토록 당연한 문장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던 까닭은 이토록 당연한 문장을 잊은 채 살았던 것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본인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려는 다짐, 즉 욜로는 본인과의 약속이다.


욜로는 문제의식을 느끼게 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1인 가구, 혼밥, 혼술. 예전에는 청승맞아 보이던 것들이 이제 나를 위한 선택으로서 당당히 빛난다. 하지만 인간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총량에는 한계가 있기에 ‘나’한테 집중할수록 타인에게 쏟는 관심은 줄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관심 없는 대상에 게을러진다.



만남의 값은 얼마일까


우리가 정말 ‘나 혼자’ 충분하다면 시도 때도 없이 SNS를 하는 이유는 왜일까. 짐작하건대, SNS를 켜면 친구가 어디서 뭘 먹고 누구랑 뭘 하는지 굳이 만나지 않아도 곁에 있는 것처럼 알 수 있으니 만남에 절실하지 않아진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그리움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친구보다 스마트폰이 가깝고, 대화보다 SNS가 빠르고, 혼자 먹는 밥과 술이 점점 편해진다. 자연스럽게 만남이라는 가치가 점점 사치가 돼간다.


이토록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난다. 아니 만나야만 한다. 돈과 시간이 든다고 해도 우리는 친구이니까 말이다. 감히 우정에 값을 매길쏘냐. 그래도 계산은 각자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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