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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Feb 10. 2021

안나 카레리나, 당신은 어떤 사랑을 할 건가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톨스토이의 대답

오늘은 장장 1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서 같이 얘기해볼까 합니다. 이런 장편 소설은 읽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한 권짜리 소설에서 맛볼 수 없는 작가의 깊은 사색과 성찰을 맛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도 그의 깊은 사색과 성찰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이 소설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메시지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하고 진실되게 살라. 그리고 이성과 논리에 기대기보다는 당신의 가슴속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 위키백과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남편이 바람을 피워 상심해 있는 '돌리'라는 여인을 위로하기 위해 안나 카레니나가 모스크바에 도착하면서 시작됩니다. 안나는 유능한 고위 관리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의 아내로 순조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인생은 기차역에서 우연히 브론스키 백작을 만나게 되면서 180도 바뀌게 됩니다. 브론스키는 미혼인 데다 매력적이고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기까지 하죠. 그는 안나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면서 사랑을 고백하게 되고, 안나는 이 자극적인 사랑을 맞보곤 그를 잊지 못해 밀회를 나누게 됩니다.


반대편에는 또 하나의 커플이 있습니다. 바로 키티와 레빈 부부입니다. 이 소설의 사실상 주인공인 레빈은 도시적이고 세련된 브론스키와는 정 반대 인물입니다. 행동과 말투가 모두 투박하고 세련된 것이라고는 하나 볼 수가 없는 시골 사내입니다. 그는 시골에서 영지를 운영하면서 자급자족으로 하루하루를 지냅니다. 이런 그에게도 변화가 찾아옵니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키티라는 여인이 나타난 거죠. 그러나 당시 브론스키에게 끌리던 키티에게 청혼을 거부당합니다. 레빈은 이후 "다시 그녀를 보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우연히 시골길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고 그녀 없이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청혼을 하고 함께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톨스토이는 이 두 커플의 선명한 대조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줍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도시적이고 영화같은 사랑과, 레빈과 키티의 시골적이고 순박한 사랑입니다. '세기의 사랑'같이 보이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서로를 타락시킵니다. 내연남 때문에 어린 자식인 '세료자'까지 버린 안나는 죄책감에 빠지면서도 그에게 계속 집착하게 됩니다. 사회의 냉혹한 시선과 자기 비하 속에서 그녀가 기댈 곳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난 사랑을 원해. 그런데 사랑이 없어. 그러니 모든 게 끝난 거야'(7부 407p). 그러나 그녀는 브론스키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망상과 질투심에 빠져 모르핀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지내다 처음 자신이 도착한 기차역에 몸을 던져 생을 버립니다. 


톨스토이는 이 안나의 죽음에 대한 부분을 1872년 1월 '툴라신문'의 한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실제 불륜을 저지른 여인이 선로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죠. 안나가 기차역에서 목숨을 버린 것은 작가의 탁월한 비유입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정열적이고 자극적이고, 영화 같았지만 이 둘의 사랑은 그들을 한 발자국도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단짠'(달고 짭잘한) 같은 사랑을 원합니다. 누군가를 처음 볼 때 떨리는 마음을 다시 느끼고 싶죠. 하지만 이런 사랑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극이었던 것이죠. 그러한 자극이 충족되면 또 다른 자극을 원하게 될 뿐입니다. 이런 욕구 충족에 의한 사랑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바닷물처럼 우리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톨스토이는 안나-브론스키, 키티-레빈의 대조를 통해 이런 자극적인 사랑의 결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죠. 


이반 크람스코이 작 "낯선 여인의 초상"(1883). 안나 카레니나를 이미지로 한 것이라고도 한다. 위키백과


레빈은 이와 반대로 깊은 사색과 성찰을 통해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레빈과 키티 부부에게도 질투와 증오와 같은 위기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안나-브론스키 커플과는 다르게 서로 대화하고 화해하면서 삶을 살아가죠. 이 둘의 사랑은 서로를 성장시킵니다. 


이 책은 레빈의 성장 소설이기도 합니다. 무신론자이자 허무주의자였던 레빈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철학책을 탐독하고 사색에 빠집니다. "'내가 과연 무엇인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 없어. 그런데 그것을 알 수 없단 말이야. 그러니 난 살 수 없어.'"(8부 503p).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사실 인간에게는 살아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일 뿐입니다. 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혹은 옳은 삶인지 결정지을 수 없는 정신적 아노미 현상에 맞닥드리게 됩니다. 레빈은 이러한 상황에 맞닥드리고 고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던 중 레빈은 한 노인과의 대화에서 그가 어렴풋이 갖고 있던 생각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는 노인과 함께 얘기를 하다가 농부들에게 자신의 이익을 나눠주고 친절하게 사는 포카니 영감에 대해 얘기하게 됩니다. "자기의 필요만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미추하처럼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도 있고, 포카니치처럼 공정한 노인도 있으니까요. 그분은 영혼을 위해 살지요. 그분은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8부 515p) 

레빈은 이 장면에서 깨닫게 됩니다. 자신은 이런 영감을 가슴 속으로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선하다고 생각했을까요? 만약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체계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삶이 무의미하다면 이런 영감을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윤리 혹인 절대적 기준이 내재돼 있죠.


톨스토이는 레빈의 입을 통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이미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요. 그것은 철학 책을 읽고 논리와 이성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면서, 혹은 종교나 윤리에 의해서 이미 체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한 가지, 즉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선한 것인가에 동의하고 있어. 나와 모든 사람은 확고하고 의심할 여지없고 분명한 한 가지 지식만을 갖고 있어. 그리고 그 지식은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어. 그 지식은 이성을 초월해 있고 어떤 이유도 갖고 있지 않고 어떤 결과도 가질 수 없어." (8부 518p)




참으로 묵직한 결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혹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 가슴속에 있으니 그 나침반을 따라가면 된다는 겁니다."어떻게 살아아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톨스토이의 대답입니다. 선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니 그런 마음을 발현하며 살자고요. 일견 단순해 보이는 결론이나 그는 아주 본질적인 물음에 대답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름다움은 논리와 이성으로 추론해서 나오는 게 아니니 이것은 잠깐 제쳐두고 우리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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