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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Jul 25. 2021

니체와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톨스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여기 신이 없는 세상에 삶을 깊이 있게 관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알고 있는 니체와 도스토옙스키, 카뮈, 톨스토이 등은 전부 19~20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19세기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비롯해 산업혁명, 과학혁명이 일어날 때입니다.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다윈의 발견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신과 신화가 사라진 공간에 과학이 그 자리를 차지하며 들어왔습니다. 과학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와 우주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는 역부족이었죠.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니체는 우리에게 '신은 죽었다'는 경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을 할 때 그는 뒤에 덧붙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이 신을 죽인 게 아니라 죽어있는 신을 발견했다고요.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종교와 신의 신성성이 사라진 현 상황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겠죠.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는 신이 없어진 사회에서 도덕과 윤리는 무의미하다고 봤습니다. 우리가 가진 도덕 체계와 윤리, 그리고 법은 모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가를 말해준 성서(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이 죽은 세상에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것은 잘못됐다거나 잘됐다고 판단을 내리를 수 없는 것이죠. 따라서 어떤 것이 좋은 삶이냐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고 개개인이 스스로 자신만의 도덕 체계를 만들며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바로 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이번 삶이 영겁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걸 '영원 회귀' 사상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인생 자체의 목적을 내세에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지금, 삶 자체에 두었습니다. 사회 모든 규범과 윤리를 해체하고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내는 삶을 살라고 했죠. 가슴을 움직이는 철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니체의 철학은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는 모두 젊은 혈기로 사회의 규칙과 규범을 부수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게 되는 때가 옵니다. 이런 삶은 실현해내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규율과 규칙에 따르는 회사를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그리고 니체가 말한 인생의 매 순간에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사회 속에 살아가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한 초인의 삶은 굉장히 버거운 삶이죠.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대문호인 도스토옙스키의 생각도 니체와 비슷합니다. 니체는 도스토옙스키를 가리켜 "내가 무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만 도스토옙스키는 니체가 말하기도 한 '초인의 삶'이 어떻게 불가능한 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나폴레옹과 같이 도덕과 윤리에 얽매이지 않고 수십만명을 죽여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몸소 실현하고자 합니다. 


라스콜니코프는 한 전당포의 노파와 그녀의 죄 없는 여동생 리자베타를 죽이고 금품을 갈취하죠.  탐욕스러운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돈을 사용하면 논리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게 그의 문제의식입니다. 자신이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자약해야 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됩니다. 그는 8년형을 언도받고 시베리아 유형소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결국 신에게 귀의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신없이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이성과 논리에 따른 삶을 살 수 있다고 상상하지만, 사실 인간은 모순 덩어리입니다. 인간의 윤리와 종교는 모두 인간의 이성과 논리보다 더 깊숙한 곳에 박혀있어 이성과 논리로도 막을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에 죄책감을 느꼈던 바로 그곳에 신이 있다는 설명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니체가 말한 초인의 삶에 다가가다가 결국 신에게 귀의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또 다른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도 인간과 신의 관계에 천착합니다. 그러나 다른 실존주의자들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 달리 그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더 많은 신경을 씁니다. 그는 '안나카레리나라'는 소설 속에서 도시적 삶과 농촌적인 삶을 대비해 보여줍니다. 도시적 삶은 '단짠' 같은 삶입니다. 매혹적이고 반짝거리는 삶이어서 모두가 그들을 우러러보죠.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는 더 자극적인 삶을 바라는 사람들의 갈증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반면 농촌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투박하고 무식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지만 어쨌건 자신의 삶을 천천히 가꿔나가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행복하고 선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결론을 냅니다.


모든 사회의 규칙을 깨버리는 니체의 철학은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해보면 규칙과 규범 등이 인간의 삶 속에 너무나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인간에게서 인위적으로 제거해버리게 되면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점도 알게 되죠. 톨스토이가 주장하는 선하고 행복하게 사는 삶은 단순하고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굉장히 어려운 삶입니다. 자신을 포함해서 인생을 선하고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시골에 사는 농부처럼 자신의 삶을 소박하고 행복하게 가꿔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요? 니체,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주장은 각각 다르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과연 만족스러운 삶일까요.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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