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 소년 코타로>
올해 4월부터 6월까지 일본 아사히 TV에서 방영한 드라마 <독거 소년 코타로>가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되고 있다. 일드를 썩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무명 만화가의 옆집에 이사 온 다섯 살 소년 코타로. 혼자 사는 의젓한 소년 덕분에 오히려 이웃 어른들이 철들어간다’는 설명이 흥미로웠다.
총 10회 분량인 이 드라마는 한 회당 20분을 조금 넘는 길이로, 후루룩 보기에 부담이 없다. 이야기 흐름도 딱 드라마 소개 문장 그대로여서 얽히고설키는 복잡함이라든지, 극적인 상황이 연출된다든지 하는 것도 없다. 어딘가 모자란 듯한 이웃 어른들은 다섯 살 소년 코타로를 통해 가까워지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간다. 코타로를 보살피고 어울리면서는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 특별히 큰 사건은 없지만 소소한 일상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잔잔한 감동을 주는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고, 꽤나 목적에 맞게 만들어졌다.
다만 아쉽게도 일본 문화의 특성인 것인지 원작이나 각색의 가치관인지 모르겠지만, 코타로가 혼자 살게 된 이유인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대한 관점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쓴다.
대여섯 개 방이 오밀조밀 모인 2층짜리 건물, 시미즈 아파트에 다섯 살 소년 코타로가 홀로 이사를 온다. 근엄한 사극 말투를 쓰고, 이사를 오자마자 주민들에게 고급 각 티슈를 선물하며 인사를 하는 것까지 보통 꼬마는 아닌 듯하다. 어른을 흉내 내는 코타로의 주변에는 나이로는 어른이지만 어딘가 아쉬운 이웃들이 등장하는데, 마음만큼은 착해서 코타로가 외롭거나 괴로운 꼴은 못 본다. 만사가 귀찮은 듯 굴던 옆집 이웃 카리노가 어린이 유괴 사건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고 코타로 혼자서는 어딜 못 가게 한다든가, 유치원 학예회에 온 이웃이 총출동해 풀 죽어있던 코타로의 기를 팍팍 살려준다든가 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코타로의 존재는 이웃 어른들이 더 따뜻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혼 후 홀로 사는 중년 남성 타마루는 떨어져 사는 아들 생각에 코타로에게 잘해주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제일 앞장서서 코타로를 걱정하는 이웃 아저씨가 되고, 혼자 사는 코타로의 상황을 체크하며 아이의 엄마가 남긴 보험금으로 집세를 대신 내주는 업무를 맡은 젊은 변호사 고바야시는 좀 더 ‘변호사 같은’ 업무를 맡고 싶었던 처음과는 달리 어느새 코타로가 엄마의 부재를 알고 충격을 받게 될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고 마음 아파한다. 이웃들은 코타로의 사정을 모두 알게 되지만 코타로에게는 비밀로 한 채 강해지고 싶다는 아이의 말과 태도를 존중하고 묵묵히 응원한다.
드라마에는 각자의 사연이 자세히 나오지는 않는다. 그건 주연 코타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나마 밝혀지는 내용은 코타로가 아빠의 가정폭력을 신고했고, 엄마는 집을 나갔으며, 그 결과 법의 보살핌을 받으며 홀로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엄마는 사망했고 그 보험금으로 집세를 충당하고 있는 것인데 아직 코타로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 정도다.
어른인 우리의 시선으로 보기에 코타로의 가정폭력 신고는 매우 영리한 행동이었고, 전에 비해 훨씬 안전해졌지만 아직 다섯 살인 코타로는 그런 것까지 계산하기엔 너무 어리다. 실제로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를 당해 부모와의 격리가 이뤄지게 되면 아이들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인 부모와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한다. 겨우 10년 정도 산 그 아이들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기 때문.
코타로 역시 마찬가지. 늘 과장된 말투와 행동을 취하며 씩씩해 보이려 애쓰는 것은 강한 사람이 되어 부모와 함께 살고 싶기 때문. 내가 약해서 신고를 했고, 그것이 아빠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하는 걸 보면 코타로는 아무리 어른인 척 해도 그저 다섯 살 아이일 뿐이다. 그래서 마냥 귀엽고 웃기기만 했던 코타로의 어른 흉내가 어느새 코끝 시큰한 사연이 되어버리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쓴소리를 해보련다. 총 10회로 이뤄진 드라마의 절반은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며 순조롭게 흘러간다. 내가 가장 문제라고 생각한 회차는 바로 6회였다.
코타로의 어른 이웃 중 하나인 미즈키는 남자 친구에게 데이트 폭력을 당하고, 마스크로 가린 얼굴의 상처를 본 코타로와 카리노는 한데 모여 어떻게 대응할지 이야기를 나눈다. 카리노는 경찰에 당장 신고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지만, 코타로는 예의 엄숙한 척을 하며 반대한다. 이때의 대화가 아주 위험했다고 본다. 잘못 전달되지 않도록 넷플릭스의 번역을 그대로 옮긴다.
그러면 안 되오, 미즈키 공. 그대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오.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것은 그대에게 필요한 일이지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니지 않소? 이 몸은 아버님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소. 미즈키 공은 나처럼 되면 아니 되오.
코타로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폭력을 쓴 아빠를 신고한 것에 대해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자책할 수 있다. 그 상황을 보여주는 것은 어른인 시청자들로 하여금 코타로를 안쓰럽게 여기도록 만든다. 하지만 코타로가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하는 방식으로 그 자책감을 전달해선 안 된다. 코타로의 의견에 대해 미즈키는 “남자 친구 하고는 행복했던 일도 있었어”라고 답하며 울고, 코타로는 “잘 알고 있다”라고 위로를 건넨다. 이 무슨 다섯 살 꼬마가 성인 여성을 가스라이팅하는 ‘대환장 파티’란 말인가. (다행히 미즈키는 카리노의 의견대로 남자 친구를 경찰에 신고한다)
문제의 회차 마지막. 코타로는 함께 목욕탕에 간 카리노의 옷에 쓰인 영어 알파벳 DV를 보고 ‘아버지가 검색하던 단어’라며 뜻을 묻는다. 정확히는 ‘DV치료’라는 단어로, 가정폭력 치료를 뜻하는 듯하다. 카리노가 “아마 너와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을지 몰라”하고 이야기하자 이어지는 코타로의 말.
그렇다면 아버님은 실제로는 아무도 때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런 거라면 다시는 아버님이 때리지 않아도 되도록 이 몸은 더욱 강한 사람이 되겠소.
그리곤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는 것으로 이 회차는 끝난다. 아빠의 가정폭력을 마치 어쩔 수 없었던 실수처럼 언급하며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대환장에 대환장을 더한 문제적 회차. 폭력이 가벼운 실수처럼 여겨지고, 신고를 할 때도 가해자 입장을 생각해주어야 하고, 약해 보이면 맞을 수도 있다는 듯한 폭력에 대한 관용적 태도는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이해 불가능한 잘못이다.
<독거 소년 코타로>엔 가정폭력과 데이트 폭력, 이혼, 미래가 불안한 청년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등장한다. 충분히 자극적으로만 다룰 수도 있을 소재들을 따뜻한 이야기에 녹아들게 한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하지만 자극적이든 그렇지 않든 소재의 무게를 고려해 좀 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난봄, 나는 사이코패스와 살인사건에 대한 두 개의 드라마를 봤고 그중 한 편은 중도 하차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끝까지 본 후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전자는 살인을 저지른 범인에 서사를 부여했고 후자는 살인뿐 아니라 그 어떤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게도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한끗 차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작품이든 해외 작품이든 좀 더 예민하게 만들어지기를, 그래서 진하게 감동하고 끝내 감탄하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