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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May 11. 2023

명예퇴직 1년 전

  나는 시니어. 명퇴를 1년 앞두고 있다. 1년이라고 한건 내가 정해놓은 것. 아직 결정되지도 않았지만 내 마음속으로 그렇게 정한 것이다. 아, 더 이상 하면 안 되겠구나, 더 이상 못하겠구나. 둘 중에 한 가지 때문이었다. '더 이상 하면 안 되겠구나'일 때는 내 안에 의욕이 솟구치지 않아서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이고, '더 이상 못하겠구나'는 자꾸 아픈 데가 생겨서이다. 아니 특별히 아픈 데는 없지만 자주 머리가 멍해지고, 정신이 맑아지지 않아서이다. 엊그제도 주차하다가 모서리에 꽁무니를 박아버렸다. 이제 거의 다 나아가지만 작년부터 입안이 헐고 입술까지 염증이 번지는 증세가 대여섯 달 가고 있다. 

 

어쩌면 선생이란 직업은 연예인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지식을 전달하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직업이기는 하지만 많은 아이들 앞에 서야 하는 입장에서 놓고 보면 연예인과 비슷한 점이 있다. 고객을 의식하듯이 항상 학생을 의식해야 하니까. 옷도 그냥 편하게만 입으면 안 되고 어느 정도는 격식을 차려서 입어야 하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나를 좋아해 줄 때 수업도 잘 되므로 은근히 인기에 신경이 쓰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입병이 나서 입이 벌게져 있는 상태가 다섯 달이나 지속되었으니 아이들한테 엄청 미안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미안함보다는 내가 더 괜찮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던 거였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되니 마음이 힘들어졌던 거였다. 머리숱도 자꾸 없어져 가는 것이 영 신경이 쓰이고, 이거 가발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참다못해 지금은 부분가발을 하고 있다, 늙어도 예뻐 보이고 싶은 건 솔직히 욕망이다.

 '그런 저런 이유가 이제 못하겠다'의 이유이다. 


 여기저기 연수도 쫓아다니고, 이것 저것 시도도 해보고, 어떻게 하면 수업을 좀 바꿔볼까, 하는 궁리도 사라졌다.  젊은 사람들한테는 참 미안한 일이어서 이런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지를 못한다. 별로 무엇을 새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우울증인가? 별로 무엇을 새로 하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이 좀 힘이 든다. 항상 무엇인가를 새로 도전하고, 도전까지는 아니어도 새로 시작해 보고,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꿈틀거려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이 꿈틀대지 않는 마음이 힘이 드는 것이다. 아, 더 이상 하면 안 되겠구나... 사실, 이제는 마음이 그만 꿈틀거려도 될 나이라고, 무엇을 새로 시작할 나이는 아니라고, 지금 이대로가 그런대로 좋은 거라고, 요즘 많이 나오는 말로 나를 다독다독해 보지만, 오늘 아침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한참을 버벅거렸다.


 출근준비까지 열심히 했는데 학교에 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밀린 업무도 없고 처리해야 할 공문도 없고, 마침 수업시간은 세 시간째 비어 있어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비어있는 시간이 금쪽같이 귀해서, 빈 시간이 다가오면 하루 전부터 마음이 가볍고 이것을 해야지, 저것을 해야지, 했었다. 시를 읽기고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괜찮은 책을 골라놓고 읽기도 하고. 아침의 빈 시간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기는 지금도 소중한 아침시간이라고 여기니 함부로 무엇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 소중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정작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읽던 시집을 폈는데, 도대체 의미가 잡히지 않는 젊은 시인의 시들, 어쩌다 의미가 잡혀도 두 세편 이상은 연이어 읽을 수가 없는 시들, 꽤 나이 지긋한 시인이 쓴 것도 어떤 것은 너무 난해하고, 또 너무 나이가 많이 드신 분의 시는 병과 싸우는 한탄조가 많고, 에라 그래서 접어서 책꽂이에 다시 꽂아버렸다. 그러면 소설을 읽어볼까? 읽으려고 미리 챙겨두었던 소설책을 펴 들었지만 아침부터 소설책을 읽고 있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소설을 시보다 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내게는 왠지 좀 풀어져도 되는 영역이라고 여겨지기 때문. 들어야 할 원격연수도 있고, 수업에 쓸 자료도 준비해야 하지만 그건 오후에 해도 되는 일... 오후에 할 일을 미뤄놓고 이렇게 소중한 아침 시간에 소중하고도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하니 잘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있음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글을 쓰다 보니 알겠다. 이렇게 이 아침에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고 버벅대고만 있는 것의 이유를 말이다. 소중한 것을 잃고 있다? 그러면 소중한 것은 무엇이지? 중요한 일이란 무엇이지? 앞으로 나에게 소중한 일이란, 소중하고 소중하지 않고를 잃어버리는 일인지 모른다. 소중함과 소중하지 않음을 잃어버리는 일. 


 마침 봄비가 조금씩 오고 있다. 날은 흐리고 햇볕은 없다. 꿈틀대는 마음이 없고 속으로 들여다보는 마음만 있어서인가. 

 내년에 퇴직을 하고 나면 아침에는 무얼 할 건가? 이런 아침에 무얼 할 건지 아무 생각이 없다. 나는 그저 '더 이상 하면 안 되겠구나'와  '더 이상 못하겠구나' 사이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2막을 열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엇을 특별히 하고 싶어서이지도 않다. 퇴직 전의 무기력증인가? 남들은 퇴직하면 제주도로 한달살이를 간다, 해외여행을 마음껏 다닌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 등등 의 말들을 하지만,  아직 그건 나의 일은 아닌 듯,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냥 달수를 세고 있다. 아, 일곱 달 남았구나. 남은 일곱 달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단지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리는 연습을 해본다. 잃어버리는 것이 당연한 거라는 마음 연습. 마음도 연습이니까. 얻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단지 잃어버리는 마음. 답을 내려는 마음을 버리고, 아니 잃어버리고, 그 잃어버리려는 마음까지 잃어버려야 답이 나온다. 또 답을 구하고는 있지만. 몇 글자 적다 보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그저 다가오는 점심을 맛있게 먹을 일이다. 나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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