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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May 17. 2023

나는 글을 쓰는 사람, 글로 무엇을 하려는가?

- 오월의 정의, 문학의 실천으로

 오월이다. 매화, 산수유꽃으로 시작한 봄이 개나리 진달래를 거치고 철쭉을 건너 등나무 오동꽃으로 닿는 계절이다. 단체 카톡방이 깜박인다. 43주년 5.18 기념행사, 이태원 참사 추모문학제, 고정희 문학제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지난 4월은 바닷물에 빠져 죽은 304명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 해결을 촉구하는 세월호 애도기간이었다. 나는 아직도 세월호의 아픔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한 마디도 쓸 수 없다. 그 소식을 듣던 날의 당혹스러움과 어이없음과 그래도 어떻게 건져지겠지 하는 마음과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았을 때의 큰 슬픔을 기억한다. 자식을 잃은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그 깊이의 알 수 없음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그건 남의 일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4월 16일. 참사 이후 몇 년 동안은 그 기간에 온 나라가 슬픔에 빠져 있는 듯해서, 내 몸으로 낳은 자식의 생일을 음력으로 바꾸어 지내기도 했다. 내 자식의 생일날 슬픔에 빠져 있는 게 싫어서! 304명의 죽음보다 내 자식 하나의 기쁨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나는 아직도 내 자식의 기쁨과 안위에 갇혀 한 발짝도 꼼짝 못 하는 답답한 엄마에 불과하다. 몇 마디라도 쓰는 건 위선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저기 카톡방에서는 참사와 추모를 얘기하고 독촉한다. 그래, 집도 광주로 이사 왔으니, 이번에는 한번 가볼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5.18 광주민중항쟁기념 오월문학제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시 쓰고 소설 쓰고 동화 쓰는 작가들이 모이는 행사라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나도 시를 쓰는 사람이지만 나는 여전히 변방의 작가. 얼굴을 아는 사람도 적고 잘못하면 한쪽 귀퉁이에서 우두커니 앉았다 올 수도 있는 거였다. 가지 말까, 갈까. 에이 그래도 한번 가보자 뭐. 

  추모시와 기념사는 한결같이 오월의 아픔을 얘기하고 그때의 총과 칼을 얘기하고 있었다. 43년 전의 아픔을 지금의 아픔처럼, 43년 전의 남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토로하고 목청 높여 말하고 있었다. 중간에 성악가 소프라노가 경쾌한 노래를 부르고 기타 치는 밴드가 흥을 돋우기는 한 것이 구호만 외치던 옛날과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이긴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왜 난 저렇지 못하는가를 곱씹고 있었다. 나도 그때 광주에 있었는데. 나도 80년대를 대학가에서 지내온 세대인데. 나도 한때는 최루탄을 피해 가며 시위를 하던 학생이었는데. 지하조직에 숨어들어 막스를 공부하고, 교사가 되어서는 노동자라 했다고 해직을 당하고 5년 동안 학교에서 쫓겨 나와 있던 신세였는데….  

 지금 내 가슴엔 오월의 분노가 없다. 아니 어떤 분노도 없다. 아니 인제 총과 칼이 싫고 무서움과 두려움이 싫다. 몇십 년 전의 참사의 아픔을 기억하고 그것을 제 아픔으로 녹여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는 가질 수 없다. 왜? 무엇 때문에? 남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가? 행사 내내 물 위에 뜬 기름 같았다. 물론 거기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음에서 오는 난처함과 껄끄러움이 있긴 했다. 친한 몇 사람이 무리 지어 있으면 물 위에 떠 있는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하여튼 나는 그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공감하지 못하고 빠져들지 못하는 무감각만 다시 확인해야 했다. 

 나는 나의 일상이 소중하다. 봄이 되면 꽃 피는 거 구경 다니고 놀러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 쏟아지는 햇빛을 놓치면 안 된다. 그 햇빛 속에서 나의 하루가 자유롭고 평화롭기를 기원한다. 그 일상의 흐름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답답한 강당에서 놓쳐버린 하루치의 신록을 애석해한다. 지금 나무는 얼마나 푸르고 산 색깔은 얼마나 이쁘냐 말이다. 사회적 정의는 그런 거 다 하고 시간이 남을 때 들여다보는 사치이다. 나는 아직 나의 자유와 평화를 해결하지 못했다. 사회적 정의와 개인의 자유가 일치하는 사람들의 삶이 부럽다. 그것을 분리시키고 있는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자책의 시간을 꾹꾹 눌러내고 있었다. 3시간 동안.    

 불법에서는 ‘나’와 ‘남’이 한 몸이라고, 따로 있지 않다고 한다. 끄덕끄덕하면서도 가슴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 성격 탓인가? 그럴 수도 있다. 난 어디서나 쉽게 웃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성격이 아니므로. 그저 물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한 성격이므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도 웬만한 상황이 아니면 눈물이 나지 않는 사람이니까. 나를 이렇게 감동적이지 않게 무표정하게, 무감동적이게, 냉정하게, 태어나게 한 부모를 원망해야 하나….

 뒤풀이와 2차로 저녁 식당을 공지한다.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식당이었다.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은 얼추 이백 명은 넘을 듯한데, 그 무리에 끼여서 밥을 먹는다?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무리에 끼지 못하고 혼자 돌아서는 발걸음이 참 씁쓸하고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척, 맞는 척하면서 그럭저럭 묻어가면 될 것을. 돌아섬도 나 잘난 체를 하고 싶은 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남편이 말을 전한다. 누가 그랬다고. ‘밥이라도 먹고 가지’라고 했다고. 그래, 그럴 걸 그랬나? 밥이라도 먹고 올 걸, 그랬나? 터덜터덜, 혼자 되돌아오는 것보다 그게 더 나았으려나. 

 집에 돌아와 덩그러니 행사 책자를 내려놓는다. 책자 제목은 ‘ 오월의 정의, 문학의 실천으로’이다. 아파트 근처 초등학교에 현수막이 붙어 있다. ‘오월의 정신을 지금의 정의로.’ 초등학교에도 붙어 있는 정의를 나는 못 가지고 있구나. 나는 글을 쓰는 사람, 글로 무엇을 하려는가. 참으로 난처하고 난감한 계절,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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