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한 일요일 오후이다. 무엇을 하기가 참 난처하다. 습하고 더운 날씨. 마당에 나가기도 마당치가 않다. 풀은 하루가 지나면 한 뼘보다 더 높이, 한 움큼씩 자라 텃밭은 이미 풀밭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여름 한철 남편을 먹여 살리던 상추 몇 포기는 털 뜯긴 닭 모가지처럼 빼빼 말라 있다. 잎이 나오자마자 뜯어 버리니 줄기만 삐죽하니 남아 있다. 상추는 스러지고, 심지도 않았는데 깻잎이 올라왔다. 무심히 버려두었던 깻잎이 어느새 커서 먹을 만큼 되었다. 벌레가 먹어서 구멍이 숭숭 뚫린 깻잎이 가여운가, 손바닥보다 작은 깻잎을 소중히 먹는 우리가 더 가여운가.
텃밭의 풀을 매 볼까, 잔디밭의 잡초를 뽑아볼까. 웃자란 매화나무 가지를 쳐줄까, 장미 줄기를 잘라줄까, 사방에 번지고 있는 어성초를 뽑아볼까. 풀을 매는 일은 허리가 아파 못하겠고, 가지나 줄기를 잘라주는 일은 손목이 아파 못하겠다. 퇴행성 관절염이 와버린 지 오래다. 그래도 한 시간만 풀을 뽑아볼까.
긴 바지 긴팔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마스크를 하고 모자를 쓰고 모기 퇴치제를 온몸에 뿌리고 마당에 나선다. 풀은 오늘 아침 내린 비 때문에 뿌리가 연해져 있다. 조금만 호미 끝을 밀어 넣으면 별로 힘들이지 않아도 뽑혀 나온다. 그러나 어성초만큼은 그렇지 않다. 어성초 그것은 알싸한 향이 벌레를 잡아준다고 해서 집 둘레에 몇 개 심었던 것인데, 뻗어나가는 기세가 얼마나 세찬지, 둘레가 온통 어성초 잎으로 감싸여 버리고 말았다. 더 두고 보면 칡덩굴처럼 집을 휘감을 것이므로 박멸하기로 했다. 그러나 박멸은 어렵다. 뿌리가 얼마나 길고 깊던지 시멘트 벽을 뚫고 나갈 정도다. 어성초를 뽑을 때마다 지렁이가 꿈틀댄다. 이제 지렁이쯤은 괜찮다. 손으로 집어 올리지는 못하지만 흙으로 덮어줄 수는 있다. 풀과 벌레들에게 어지간히 무던해졌다.
한 시간쯤 하니 땀이 쏟아지고 허리가 아파온다. 그만 하자. 그만하고 들어가 책을 볼까. ‘코스모스’를 읽고 있는데, 그걸 마저 볼까. 땡볕 아래서 우주를 생각하니 머리가 띵 해져 온다. 쉬운 소설을 읽어볼까.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던 ‘식물의 사생활’을 읽을까. 식물의 사생활에서는 왜 그것의 제목이 식물의 사생활인지 아직 감을 잡지 못했다. 불구의 몸이 된 아들의 성욕을 해결해주는 엄마의 발품이 안타깝기도 하고 징하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던 장면이 있었지. 아들의 성욕을 해결해 주는 것이 미칠 것 같은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이라 했지. 오늘 생각해보니 어미들의 그 징한 모성애가 어성초 뿌리처럼 허옇고 길고 끝이 없다. 어성초 뿌리가 잘리면 독한 향이 풍겨 나오는 것처럼, 어미의 그 모성애도 배반을 당하면 아니 어느 길목에서 막혀버리면 벽이라도 뚫을 수 있을까. 식물을 읽으면서 동물의 사생활을 엿보는 마음이다.
결국 영화 한 편을 택했다. 이 오후의 지리멸렬함을 건너뛸 수 있는 방편으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집에서 보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영화관 냄새, 매캐한 곰팡이 냄새를 가려버리는 팝콘 냄새, 그 컴컴하고 습기 찬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니까.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브로커’를 선택했다. 8000원을 결제하고 보았다. 별로 재미없다고 평하는 것을 들었지만, 뭐, 감상은 다 다르니까.
아이유의 연기가 놀라웠다. 아기를 사고팔려는 사람들이 꼭 애완견을 거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살인사건이 끼어드는 것이 어지럽기도 하고, 왜 인물의 동선에 보육원이 들어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큐브 조각 맞추듯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차갑고 냉정한 어미의 모습이 결국은 모성애였다는 느낌과 함께, 브로커들과 아이 엄마와 보육원 꼬마가 ‘떠돌아다니는 한 식구’처럼 느껴졌을 때는, ‘아, 이건 참 따뜻한 영화구나’ 싶었다. 차가움 속에 얼음처럼 들어있는 따뜻함을 보았다고나 할까. 얼음의 온도, 얼음의 온기가 느껴지는 가족,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 틀 안에 들어왔을 때 비로소 안도하게 되는 따뜻함, 그런 것이 있었다.
감상에 젖어가던 영화의 후반부쯤, 저번 주에 보았던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헤어질 결심’!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 제목이 이별의 연습인지, 이별의 결심인지, 헤어지는 연습인지를 몰라서 핸드폰을 검색할 수 없었던 영화, 피를 보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것이 징하고 지루해서 끝나는 시간을 검색해보고자 했었다.
그런데 제목만 떠오를 뿐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겨우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주인공이 해변을 찾아가 스스로 모래 무덤을 파고 죽음을 마련하는 모습, 밀려오는 파도가 불룩한 모래 무덤을 덮어버리고 쓸어버리는 모습, 여자를 찾지 못해 파도 속으로 울부짖으며 들어가던 남자의 모습…. 아, 감독이 누구지? 이렇게 어마어마한 엔딩을 만든 사람이? 놀라운 결말 앞에 내내 지루했던 시간이 한꺼번에 쓸려가 버리는 듯했던 영화… .
그런데 그 앞은 무엇이었는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탕웨이가 떠오르고 내용이 대강 생각났다. 영화 한 편을 보았더니, 저번에 보았던 영화가 잘 떠오르지 않는 현상,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기억의 공백을 겪었다고 해야 할까. 그냥 기억력 감퇴 증상이라고 해야 할까. 퇴행성 관절염이 조기에 찾아온 것처럼, 퇴행성 기억력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
일어나는 일마다 모두 의미가 다 있는 건 아닐 텐데, 어떤 일마다 원인과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도 생각의 습관일 거다. 그런데 말이다, 무슨 의미가 분명 있는 거였다.
나는 분명히 봤는데 왜 영화의 내용이 생각 안 난단 말인가? 그것도 불과 일주일 전에 보았던 것인데? 분명 있었던 일인데 내 머릿속 기억에서 없어졌다. 그러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일까. 까맣게 잊으면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된다는 말인가.
일주일 전은 분명 과거의 일이다. 과거는 현재에 없는 것이다. 과거란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 기억에 없으면 없는 것, 나는 기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가 말해주고 있다고 해야 할까. 나는 현재로 존재한다. 인생은 꿈이다, 인생은 한 편의 영화다. 무상하지만 현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무엇을 붙잡고 있었던가를 생각한다. 지나간 기억, 지금은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형체가 없는 기억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억은 온전한 것이었는가? 기억은 모두 있었던 것으로 정확한 것인가? 기억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받아들인 하나의 편견 아니었던가? 그동안의 생각의 방식, 느낌의 방식으로 집어넣었던 것은 아닌가. 그것을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도 않은 것을 붙들고 추억하고 고집하고 즐거워했다가 괴로워했다가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던 ‘헤어질 결심’이 ‘현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현재에 있기’를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하루 해가 꼴깍 넘어간다. 저녁 여덟 시다. 무료했으므로 많은 것을 했다. 오늘도 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