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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May 12. 2023

'나'에게로의 여행

(feat. 나를 읽는 인문학 수업)

40살을 앞둔 2018년, 초등 5학년 아들, 1학년 딸과 함께 제주 한 달 살이를 떠났다. 뭐가 그리 불안하고 우울했는지. 그 땐 그저 떠나고 싶었다. 일도, 엄마로서도 충분하다는 확신이 내 안엔 없었다. 신랑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며 가라고 등을 떠밀어 주었다. 등을 떠밀어 준 그 손이 지금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제주에서의 그 한 달은 나와 가족들에게 잊지 못할, 가슴 속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추억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나를 읽는 인문학 수업>은 지리학자, 상담심리학자, 문예학자, 언어학자, 교육학자 5명이 '나'의 다양성을 발견하는 그들의 다양한 시선을 제시하고 있다. 그중 가장 좋았던 내용은 지리학자인 이영민 교수님이 쓰신 1부 '낯선 곳에 던져졌을 때 비로소 '나'는 발견된다'라는 내용이었다. 책을 읽으며 낯선 제주에 던져졌을 때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했던 그 치유적 경험이 해석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 제주한달살이는 여행이 아닌 '살기'였다. 낯선 곳에서 살아보기. 분주함이 익숙한 도시에서만 자란 내가 한적함이 익숙한 시골(?)에서 살아보기. 자연이 주는 따뜻한 품을 몰랐던 내가 일상에서 바다와 오름을 누리며 자연에게 안기며 살아보기. 아이들 학원 하나 안 보내며 놀멍 쉬멍 바다에 갔다가 도서관에 갔다가 함께 장 보며 함께 요리하기. 갯벌레가 무서워서 제주를 싫어했던 내가 아이들과 갯벌레가 들끓는 바위 틈에서 몇 시간씩 '게' 잡기에 열중하기. 지렁이라면 기절하는 내가 낚시를 잘하고 싶어서 결국 지렁이를 손으로 끊으며 낚시에 몰입해 보기. 새벽같이 새별 오름에 오르며 8월 더위를 식혀주는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너무 좋아서 실컷 울어보기... 나와 우리 가족 모두 제주에서 참 행복했다.


여행은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재구성하는, 
즉 나를 바로 알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출처: 이영민 <나를 읽는 인문학>-



한적한 제주에서 분주한 서울에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나를 만났다. 나라는 사람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인간이고, 생각보다 자연을 사랑하는 인간이며, 아이들과 이 세계를 오롯이 함께 느끼고 경험하는 걸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걸 새롭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지금도 이어져서 이곳 서울에서도 그런 낯선 장소감(sense of place)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일상을 여행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번 그런 느낌을 가지긴 어렵지만 가끔은 가능하다. 자주 가는 한강공원에서 새로 피어나는 꽃을 감상하고,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가 어제와 오늘이 다름을 발견하고, 매일 달라지는 날씨 속에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한강의 풍경들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때론 충분하다.



그곳에서 일상을 꾸려가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일상의 시각으로만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행객의 눈으로 보면
그 평범한 일상들조차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사실을
그분들은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다.


                                                -출처: 이영민 <나를 읽는 인문학>-



그럼에도 문득 다시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낯선 장소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경험, 만남도 기대되지만 사실 난 그곳에서 만날 새로운 나를 기대하는 건 아닐까. 그때까진 언젠가 또 만나게 될, 아직 발견되지 못한 나를 품고 일상에서 낯선 장소감을 더 자주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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