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 시인의 '꽃'의 앞 구절이 떠올랐다.
추상적인 물질에 이름을 붙이면 왠지 친근한 기분이 든다.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항상 꺼냈던 말이 떠올랐다.
"저건 뭐야?"
그때는 호기심에 물어봤을 것이다. 처음 본 물건이 너무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질문에 답을 했던 엄마는 항상 호기심의 대상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뭐야~."
이름을 들으면 기억하기 쉽다. 다시 생각을 떠올릴 때도 편하다. 아이들이 장난감마다 이름을 붙이는 이유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 아내도 쌍둥이를 부르기 위해 태명을 짓고 있다. 소파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뭘 하나 옆에서 지켜보니까 인터넷 블로그 등을 찾아보고 있었다. 누구는 어떻게 지었나 보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내용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아내에게 내 의견을 말해볼까 하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물론 내 의견이 반영될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행복이, 성공이 어때?"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역시 난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행복이라고 지은 이유는 내가 평소에 많이 쓰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난 학교에서 항상 행복이라는 말을 학생들에게 많이 한다. 교사 생활이 너무 힘들 때, 이름만이라도 행복했으면 해서 '행복한 오선생'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름이 주는 힘은 어느 정도 있었다. 나름 조금 행복해졌던 것 같다.
성공이라는 이름은 그냥 나의 욕심이다. 우리 아이가 성공했으면 하는 욕심. 언제가 아빠에게 멋진 선물을 주는 그런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그렇긴 하다.
"너무 흔해. 오빠 욕심이 반영 된 것 같네."
우리 아내는 내 말에 이렇게 빨리 대답했다. 1초의 말설임도 없었다. 그래도 생각해 보지.
한동안 태명이 없었다. 하지만 난 꾸준히 '행복아, 성공아.'라고 불렀다. 아내도 그만 말하라고 했지만 계속했다. 어느 순간 태명이 내 뜻대로 되는 듯했다. 역시 난 치밀한 사람이야라고 속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내가 정한 태명이 바뀌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름이, 동산이.'
우리 아이들의 태명은 오름이와 동산이다. 오름이와 동산이는 처제가 지었다. 처제에게 익숙한 표현이었던 것 같고, 우리 아내도 나름 만족했던 것 같다. 난 사실 잘 모르겠다.
"오빠, 다른 사람이 태명의 의미를 물어보면 뭐라고 말해?"
뭐지. 내가 정한 이름은 안 사용했으면서 의미는 나보고 정하라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을의 입장이기 때문에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오름은 제주도 한라산 옆에 있는 작은 언덕을 말한다. 기생화산이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는 언덕 정도로 생각한다. 동산은 그냥 동네 어르신들이 산책 가는 뒷동산을 의미한다.
문득 큰 목표가 있다면 한라산의 '라산이' 정도로 지으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목표를 가지고 성공을 향해 나가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큰 목표도 좋지만 그런 삶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목표에도 만족하고 누구나 오를 수 있고, 친근한 오름, 동산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친근 장소이고, 너무 높지 않고 쉽게 오를 수 있고, 편안한 마음을 줄 수 있는 이름?"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고 뿌듯했다. 마음이 따듯해진 기분이었다. 아내도 만족했다.
물론 아내는 지금도 가끔씩 이름의 뜻을 계속 물어본다. 역시 내가 말한 내용을 잘 기억 안 하는 것 같다.
이름에는 큰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 성공이.'라고 부를 때는 힘을 주어 불렀다. 하지만 '오름이, 동산이.'라고 부를 때는 힘이 들지 않았다. 마음도 편했다. 왠지 모르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태명을 지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주는 힘이 크구나라고. 우리는 이름은 사물을 부르고 그 뜻을 정한다. 그 본질을 이름을 정한다는 게 조금 억지 같지만 이름이 주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이름 하나에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부르고, 다른 사람은 어떠게 날 부르는지 잠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