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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 Dec 03. 2021

말버릇은 하품처럼 옮는다

우리가 함께 나이가 들면서 한 가족이 김장을 하는 건 힘든 일이 되었다. 우리는 어쩌면 김장 덕분에 고모네 다 함께 모였다. 설과 추석이 만들어주는 시간으로 일 년에 두 번 다 같이 식사하는 것뿐이었는데. 같이 하는 김장이라니,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훈훈한 김장철의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 설렜다. 성격 급한 김 씨 집안답게 고모는 우리 가족이 도착하기도 전에 김장을 거의 다 마무리해 두었고, 나와 동생 1번은 남은 배추 열 포기 정도를 담당하여 속을 넣었다. 동생 1번은 나보다 2년을 덜 살았지만 배추에 속을 넣는 솜씨가 아주 능숙했다(사실 그녀는 무얼 하든 중간 이상은 하는 엘리트다). 동생 1번은 서툰 손길로 배추 속을 채우는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모에게 지금 김민지는 백김치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민지야. 안쪽까지 양념이 묻게 해야 해. 왜냐면 그러다 배추 안 쪽이 백김치 돼."
"민지야. 속을 넣을 때 배추를 너무 세게 문지르면 안 돼. 왜냐면 배춧잎이 힘이 없어져."


할머니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아빠와 내가 이마트로 장을 보러 갈 때면 할머니는 꼭 사야 할 재료를 메모지에 적어 주었는데, 거기에는 종종 '결란'이 있었으며 어떤 때는 '겨란'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모두 '계란'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계란'인데 왜 자꾸 '겨'라고 쓰냐고 했다. 아빠는 한 술 더 떠서 평생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이 '계란'도 올바르게 못 쓰냐고 말했지만 할머니는 성경에는 그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며 시치미를 뚝 뗐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계란'이라는 단어를 알려 주어도 늘 메모지에는 다른 단어가 쓰여 있었다.


할머니의 주특기는 못 듣는 척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희한하게도 할머니에 대한 불만을 구시렁거릴 때면 귀신처럼 내 말을 알아 들었는데, 할머니가 불리한 상황이면 늘 우리를 바라보며 "뭐라지?"라고 말했다. 아빠가 니트는 세탁기를 돌리면 상하니까 세탁소에 맡기겠다고 할 때도, 가스레인지 불을 깜빡하고 끄지 않았을 때도, 우리가 그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 늘 못 들은 척 "뭐라지?"라고 말했고, 아빠는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다가도 크게 웃었다.


김장이 끝나고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보쌈을 먹었다. 식탁에는 할머니가 자주 만들어 주던  장아찌와 굴이 놓여 있었다. 나와 고모는 맥주를 마셨고, 동생 1번과 2번은 화요 토닉을 마셨고, 아빠와 고모부는 소주를 마셨다. 술을 마실수록 우리의 목소리점점  커졌다. 고모는 아빠에게 PT 시작한   되었는데, 운동할  어디가 아프고 어디에 힘이 빠지는지 설명했다. 오래 운동해 왔던 아빠는 고모에게 "평소에  쓰던 근육이라서 그래. 왜냐면...."이라고 말했다. 나와 동생들은 깔깔 웃으며 "왜냐면!"이란 말을 따라 했다. 우리 가족의 대화법은 대체로 두괄식이다.  모든 말버릇은 강무순 여사에게서 왔다. 할머니가 김장하는 날인  어떻게 알았는지  그곳에 찾아   같았다. 당신의 말투를 따라 말하고 있는 우리를 보며 할머니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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