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유독 비가 오지 않았다.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았다. 나는 날씨에 취약하다. 비가 올 것처럼 흐린 날에는 유독 잠에서 깨어나기가 힘들고, 하루 종일 기운이 없다. 그러다가 비가 내리면 외출을 하려던 의지마저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나 비가 오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작년 한 해는 내내 비가 뜸하니 왠지 서운했다. 올해 장마에도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 이렇게 지나가나, 했는데 늦은 장마가 찾아왔다. 비가 많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면 종종 떠오르는 일들이 있다.
아빠도 나처럼 ‘비’에 취약한 사람이다. 어렸을 적부터 아빠가 세차를 하면 비가 내렸고, 가족 여행으로 캠핑을 갈 때면 마지막 날 비가 내려 텐트를 정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추석 연휴가 아주 긴 해가 있었는데, 아빠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차를 타고 찜질방을 갔다. 찜질방에서 한참을 재미있게 놀다가 나오니 거짓말처럼 폭우가 내렸다. 아빠는 “차를 가져와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집 근처 도로는 깊게 움푹 파여 있었고, 결국 아빠의 차는 물웅덩이에 빠졌다. 아빠와 동생은 차에서 내려 비를 쫄딱 맞으며 차를 웅덩이에서 밖으로 밀어냈다. 찜질방에서 깨끗하게 씻고 왔는데 다시 비에 젖다니.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또 아빠가 장기간 동안 바쁜 업무를 끝낸 후에 오랜만에 친구들과의 여행을 계획하고 떠나는 날이면 비가 내렸다. 아빠가 다섯 번 여행을 떠나면 세네 번은 비가 내렸다. 이렇게 적고 나니 비에 취약하기보다는 비와 앙숙인 쪽에 가까운 것 같다. 한 번은 어김없이 비가 내리는 날 아빠가 여행을 떠났는데, 저녁에 할머니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전화를 받으니 할머니는 말없이 웃었다. 아빠가 왜 웃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왜 너 놀러 가는 날엔 맨날 비가 오냐”라고 답했다. 할머니와 아빠는 서로 웃었다. 그날 이후로 아빠의 여행 날짜가 잡히면 할머니는 일기예보를 꼬박꼬박 챙겨보았다.
할머니가 떠나고 일 년이 지났을 때쯤 영화 ‘코코’를 보았다. 영화 속 주인공 미겔은 우연히 사후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미겔은 사후세계에서 죽은 사람인 헥터를 만난다. 헥터는 현생에서 자신의 사진을 제단에 올려주지도 않고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도 몇 남지 않아 조급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죽은 사람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으면 사후세계에서도 소멸해버리기 때문이다.
아빠도 할머니가 떠나기 전에 시간이 흘러 할머니를 잊을까 봐, 그것이 가장 슬프다고 말했다. 무서웠다. 세상을 떠난 후 잊혀가는 사람도, 세상에 남겨져 사랑했던 사람을 점점 잊어버리는 삶도. 모두 무서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잊힌다는 것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슬픔일 것 같다. 그렇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많은 것들이 무뎌질 것이다. 그런 나에게 이 영화 속 이야기가 말해주었다. 지금 떠오르는 그 사람을, 내가 가장 사랑하고 미워했던 당신을 오래오래 기억하라고.
올해는 자주 비가 내려서 다행이다. 비가 내리면 50km 떨어져있는 아빠를,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할 할머니를 떠올린다. 내일은 태풍이 온다고 한다. 나도 내일 아침엔 할머니처럼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아빠, 오늘 출근하는 날인데 태풍이 오네.”라고 말하며 웃어야겠다. 비와 앙숙인 아빠도, 흐린 날에 취약한 나도 내일을 무사히 살아내기를. 좋지 않은 기억도, 왠지 모르게 답답한 마음도 비에 모두 떠내려가기를.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