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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 Oct 25. 2024

물건의 위로

외로울 때면 책장을 본다. 가족이 그리울 때는 먼지 쌓인 성장 앨범을 책장 구석에서 꺼낸다. 먼저 내가 가장 많이 웃고 있는 사진들이 담긴 앨범을 펴 보자. 나의 어릴 적 사진이 담긴 앨범은 총 세 개인데, 그중 두 개는 약 3년간의 외동 시절ㅡ동생이 태어나기 전ㅡ 사진이며, 한 개는 형제가 생긴 후 앨범이기 때문에 내 옆에 동생이 어떤 자세로든 붙어 있는 사진이 대부분이다. 요즘 유튜브로 모르는 아기들의 성장기를 보게 되는데, 몇몇 아이들은 동생이 생기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며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말로는 나는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동생을 엄청 귀여워하거나, 좋아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내 성격이 그때도 비슷했다면, 아마 좋은 마음 혹은 싫은 마음이 있는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관심 없는 척을 하는 것이 때로는 내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앨범이 꽂혀 있는 맨 아래칸의 위에는 옛날 책들이 꽂혀 있다. 나란히 서 있는 책등을 검지 손가락으로 쓸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어릴 적에 여러 번 읽었던 책들을 꺼내어 본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너무 좋아서 필사했던ㅡ이때는 좋아서 따라 쓴 거였는데, 어른이 되어서야 그것이 '필사'인 것을 알게 되었다ㅡ <아기참새 찌꾸>,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빨간 머리 앤>, <가시고기> 같은 책들이다. 최근에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과장님도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책 중 하나가 <아기참새 찌꾸>라고 해서 신기했다. 이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90년대생보다는 80년대생에게 더 유명했다고 하는데, 그때 신문에도 크게 소개되면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대화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개정판이라 초판과 책 표지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 위칸에는 내가 좋아하는 소품들이 자리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 온 교회 오빠가 할슈타트에 가서 사 온 수제 인형. 이런 선물은 처음이라 크게 감동했었는데, 아마 내가 아직도 이걸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놀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들어주신 배지가 인형 앞에 놓여 있다. 압화가 배지에 꼭 붙어 있다. 압화 밑에는 할머니 대신 간병인 선생님이 '민지야, 사랑해'라고 써 주셨지만 할머니의 마음인 걸 안다. 좋아하는 물건 중에는 생애 처음으로 간 유럽의 도시 체코에서 샀던 수제 향초도 빠질 수 없다. 그리고 누구한테 받은 지 기억도 나지 않는 말린 꽃이 작은 유리 화병에 꽂혀 있으며,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선배가 미국에 가서 사준 M&N 초콜릿 통이 꼿꼿하게 서 있다.


소품이 놓여 있는 칸 위에는 스무 살 이후에 산 책들과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모아놓은 편지가 있는 상자가 여러 개 있다. 그 상자를 열어 볼 때는 내 마음이 지하 끝에 있다는 의미다. 그 상자를 여는 순간 내 모든 인연이 소환되고 잊고 지냈던 얼굴들이,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어지간히 외롭지 않으면 절대 열어보지 않는다. 연약해진 내 마음보다 큰 마음들은 모른 척하는 것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렇게 크지 않은 내 책장을 아래부터 위까지 천천히 만지고 읽다 보면 많은 시간이 흘러 있다. 시간이 흐른 만큼 내 마음의 위치도, 공간도 바뀌어 있다. 나의 물건들에는 나를 지켜주는 힘이 있다. 내가 이 집을 떠나 따로 살아갈 때도 그 물건들은 언제나 그 책장에서 든든하게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시도 때도 없이 변하지만, 시간이 담긴 물건들은 그대로 있다. 외롭고 흔들 때면 그 물건들을 바라본다. 오래될수록 그 가치가 깊어지는 것. 물성이 내게 주는 좋은 기운들. 그것이 사람의 기억이 담긴 물건만이 가진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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