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엄마, 나 생각보다 몸무게가 덜 나간다?
쓸데없이 잘 맞아떨어진 전조증상들 2
새해를 맞아 백수가 된 나! 실업급여를 받으며 재취직 준비를 하고 있었다. 24시간 내내 취직 걱정만 할 순 없으니 이참에 운동을 해서 저질 체력을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살을 뺄 생각은 없었다. 날씬해서가 아니라 29년 동안 과체중, 비만으로 살아왔으니 애초에 다이어트는 불가능이라는 걸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기 때문이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때의 난 헬스장을 매일 갔다. 백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헬스장 한 번 다녀오면 그날 할 일은 다 끝낸 거 같은 미친듯한 뿌듯함이 느껴진다.
나 오늘 하루 허투루 보내지 않았어!
아무튼 그날도 운동을 하고 샤워실에서 샤워를 했다. 그런데 뭐가 만져지는 거다.
어라? 원래 여기에 이렇게 딱딱한 혹이 있었나?
돌이켜봐도 드라마 같네. 정말 우연히 가슴에 혹이 만져진다는 걸 인지했다. 그때의 난 내가 5개월 전에 유방외과를 다녀왔다는 것도 어느새 잊고 지내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털이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합리화를 참 잘한다.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참 잘한다. 그 합리화는 긍정 회로를 돌리는 데 주로 사용된다.
아! 그냥 혹이 생겼구나! 인터넷에서도, 친구의 친구도 유방에 혹이 생겨서 맘모툼인가 뭔가 시술을 받았다던데 나도 그래서 그런가 보다~ 어차피 곧 있으면 6개월 검진받으러 가야 되니까 그때 병원에 물어봐야지.
그런데 마음 한편엔 찜찜함이 스멀스멀 자라기 시작했다. 쿨하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잊지는 못한 그날의 사주처럼. 원래는 6개월 후 검진도 가지 않으려 했으나 혹이 만져진 이상 예약 날에는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 이후로 살려고 그랬는지, 이것도 운이라면 운인 건지 스스로도 몸이 이상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건 친구와 서울대역에서 만나 논 적이 있었는데 평소라면 낮에 만나 밤까지 수다를 떨어도 힘든 줄 몰랐을 텐데 그날은 밥을 먹고 카페에 갔는데 너무 피곤했다. 그런데도 미련하게 체력이 약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그날 저녁에도 헬스장에 갔던 것도 생각난다. 대체 그때 어떻게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건 회사 면접이 잡혔다. 재취업을 시작하고 보는 첫 면접 날이었다. 당연히 그동안 면접 날마다 입었던 옷을 입었다. 그런데 옷이 큰 게 아닌가. 누가 봐도 한 사이즈 큰 옷을 입은 듯한 우스운 모양새였다.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요새 밥도 조금 먹던데.
그날 엄마가 그렇게 물어봤다. 평소엔 매일 보니 모르고 있다가 딱 맞던 재킷이 헐렁해지니 혹시나 물어본 거였다. 그날부터 인터넷 유방 혹을 검색해 봤다. 혹이 움직이면 양성, 그 자리에 딱 멈춰져 있으면 악성. 그날부터 나는 누워서 혹을 만지며 다시 긍정 회로를 돌린다.
움직이잖아, 양성이네.
그리고 20대가 된 후 처음으로 체중계에 올랐다. 거의 10년 만에 자의로 몸무게를 쟨 거다. 한평생 비만으로 살았기에 나는 내가 당연히 70kg대 초반~60kg 후반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60kg 대도 아닌 50kg대였다. 그때 스치고 지나간 인터넷의 글.
암의 대표적인 전조 증상 : 체중 감소
다음 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생각보다 몸무게가 덜 나간다?
헬스 다니더니 효과가 있나 보네. 몇인데?
60kg이 안 넘어. 그냥 안 넘는 게 아냐.
엄마는 헬스를 다녀서 그런 거라고 했고, 나는 나이가 먹어서 저절로 살이 빠지나 보다 했다. 대학 가면 살 빠진다는 건 거짓말이더니 서른 앞두고 이제야 부기가 빠지나 봐.
나는 밤에는 불안해지고, 낮에는 긍정 회로를 돌리느라 바빴다. 그러다 친한 동기 K의 할머니 장례식장을 다녀오고 집에 가는 길 02로 시작되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된다. 6개월이 지났으니 예약된 날짜에 유방 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거다. 지독한 회피형인 나는 다다음 날 예약됐던 날짜를 다음 주로 미뤘다.
무서웠다. 왜냐, 나는 쫄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