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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Nov 21. 2024

보통사람

공항에 도착해 짐을 부치고 라운지로 향했다.

회사에서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 한 덕분에 보상차원에서 일주일간의 짧은 휴가를 받았다.

많고 많은 나라 중에 파리라는 도시를 선택하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고 싶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불가능한 영역이 되어버렸지만 그래서 더 가고 싶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빠진 자리에 어떤 것들이 채워질지 궁금했다.

가벼운 식사를 하고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많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수술 이후엔 생각보다 특이하다고 말할 것들이 없었다. 웃고 떠들고 화나고 슬프고 모든 것들이 그대로였다. 다만 더 이상 전 연인을 떠올려도 감정에 변화가 없었고 새로운 이성을 보아도 설레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 한낮이던 바깥 풍경도 해가 지자 금세 어두워졌다. 시간을 확인하고 라운지를 빠져나왔다.

탑승 후 창가 쪽 자리에 앉아 겉옷을 벗자 승무원은 보관을 해주겠다며 옷을 받아갔다. 

창밖으로는 이륙을 돕기 위한 직원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였다. 매일 수도 없이 비행기의 이착륙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공항에 오는 것을 좋아할까. 아니면 그저 직장에 불과해 설렘을 안고 오는 여행객들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안고 있을 뿐일까.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상승해 일정 높이에 도달하자 가졌던 생각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두 번의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잠을 잤다

이별을 하고서 한동안은 밤을 지새웠다. 눈을 감으면 오히려 선명해지는 기억들 때문이었다. 

때문인지 요즘은 채우지 못했던 수면시간을 한꺼번에 보충하는 것 같다. 

곧 착륙을 하겠다는 안내방송이 들리고 비행기는 점점 지면에 가까워져 갔다.

택시를 타고 시내 중심부로 이동을 했다. 기사는 내게 어디에서 왔냐며 물었다. 

떠나기 전 배워둔 간단한 불어를 사용해 답을 하자 불어를 할 줄 아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조금이라는 표시를 하자 웃으며 낭만이 넘치는 파리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한다. 

도착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깨고 말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리자 에펠탑이 먼발치 우뚝 서있는 게 보였다. 일부러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앞에 도착해 주인에게 연락 하자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건물 출입구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내게 다가와 나의 영문이름을 말하며 맞냐고 물었다. 맞다고 답하자 무표정이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남자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7층에 위치한 숙소는 복도 맨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사진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국과는 다르게 간접등만이 켜져 있어 조금은 어둡게 느껴졌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아니었다. 내부를 살피다 식탁 위 화이트 와인 한 병과 마카롱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주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영 선물이라며 말했다. 설명을 하고 주인이 나가자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급격히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파리에 오는 것이 계획이었지 그다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이미 저녁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고 배고픔에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마카롱 상자를 열어 하나 꺼내 먹었다. 달콤한 맛이 좋았다. 테라스로 나가 바라보자 에펠탑의 전체가 아닌 일정 부분이 조금 보였다.  혼잣말로 오늘은 이 정도면 됐다. 하고 곧장 샤워를 했다. 첫날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둘째 날이라고 해서 없던 일정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에펠탑을 보러 가거나 센강에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며칠을 반복적으로 보냈다. 

돌아가야 할 날이 가까워지자 이대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오일째 되는 날엔 관광객들이 필수로 찾는다는 미술관에 다녀왔다. 길게 이어진 작품을 바라보며 그곳에 앉아 긴 시간을 보냈다. 배고픔도 잊을 만큼. 빠져나오기 직전에는 근처에 있던 외국인들에게 사진을 부탁하기도 했지만 그리 마음에 드는 사진은 없었다. 다시 찍어줄까? 하고 내게 물었지만 나는 괜찮다며 거짓말을 했다. 더 찍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았다. 미술관을 빠져나와 근처 공원에 앉아 쉬며 친구에게 밀린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곧장 연락이 없어 무슨 일 생긴 줄 알았다는 답이 왔다.

별일 없고 곧 돌아간다는 답을 보내자 미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잊고 있었다며 자신이 파리 여행을 하며 가보았던 식당 중에서 가장 맛이 좋았던 곳이라며 다른 곳은 가지 않더라도 이곳 만큼은 꼭 다녀오길 추천한다며 식당을 다녀온 누군가가 올려놓은 글을 보내왔다. 

글을 올려둔 사람은 시작부터 끝까지 정말 마음에 들었다며 칭찬일색을 쏟아냈다. 친구도 그렇고 얼마나 좋은 곳이길래 다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가 싶었다. 궁금한 마음에 가보려 사이트 주소를 찾아 예약을 하려고 했지만 규정이 바뀌어서인지 한 명은 예약이 불가능하다고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됐다. 무엇보다 예약을 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식당이었다. 두 명을 예약하고 혼자 가서 이인 이상의 메뉴를 시켜볼까도 했지만 혼자 와서 이인분을 시키더라도 주문이 안된다고 적혀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혼자 가면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 건가 싶었지만 식당의 기준이라면 할 말은 없었다. 그리고 친구가 보내왔던 글을 다시 확인하자 일 년 전에 작성된 글이었다. 그래서 관련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는 바뀐 규정을 전하고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자 아무런 대답 없이 다른 사이트 주소를 보내며 그곳에선 나와 같이 혼자온 사람들이 혼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같이할 수 있는 '동행'을 구하는 곳이라고 했다. 무엇을 믿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만나냐며 물었지만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은 접어두고 식당에 함께 갈 사람이나 찾아보라고 말했다. 보내준 사이트에 접속하자 말처럼 다양한 이들이 각자의 목적에 맞게 게시글을 올려둔 것을 보게 됐다. 

날짜와 시간 장소 간단한 자기소개까지. 누군가들이 올려놓은 글을 읽어보며 굳이 이렇게 까지 하면서 식당에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다 아는 맛일 테고 더 낫다고 할지라도 보통 사람이라면 구분하지 못할 수준이지 않을까 하고.

보던 것을 멈추고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공원을 빠져나와 집 근처 마트에서 간단한 장을 보고 들어가는 길에는 또 한 번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글을 올렸냐고 묻는 말에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오자는 말을 전했다. 그때 함께 가보자고. 

그러자 파리에서 해봤다 싶을 만한 일들이 뭐가 있었냐며 나를 나무랐다. 그러면서 친구는 정말 사람을 구하는 게 안되면 어쩔 수 없지만 시도라도 해 보라면서 재촉하는 말을 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미술관에 다녀온 게 전부였으니까. 

하는 수 없이 사이트에 가입을 하고 내일 저녁시간과 장소를 적은 뒤 함께 가실 분은 쪽지를 보내달라는 글을 올렸다. 조회수는 계속해서 늘어났지만 쪽지를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전 갑자기 구하는 글에 누군가 덥석 합류하겠다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계획을 세우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없을 테고. 

잠들기 전까지 아무 연락이 없다면 게시물을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을 봤던 것들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와인을 마시며 별 것 없는 여행으로 남게 될 것 같다고 느꼈다. 

사랑이 비워진 자리에 어느 것이 채워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떠났던 여행은 어리석은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비워졌다고 해서 다시 채워지리란 법은 없었다.

어떤 것들은 비워진 그대로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

마치 내게서 사랑을 하는 감정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저녁을 준비하느라 어질러진 곳을 정리하고 곧장 씻고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 들자 화면에는 몇 분 전 누군가 보내온 쪽지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도 같은 식당에 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내일 점심으로 오래전 예약을 해두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함께 오기로 했던 일행이 올 수 없게 돼서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곳이라 매장에 가서 부딪혀보려고 생각만 하고 있던 중에 올려두신 게시물을 보았습니다. 저녁 시간이 아닌 점심도 괜찮으시다면 연락 주세요. 말씀드린 것처럼 두 사람 예약을 해둔 상태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점심도 상관없습니다. 내일 식당 앞에서 뵙겠습니다."


"네 점심도 가능하다고 하시니 다행이네요. 내일 뵐게요."


친구에게는 일행이 구해져 함께 가기로 했다는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정해진 약속을 앞에 두고 12시간이 넘는 거리의 낯선 나라에서 이렇게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 만난다는 것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떠나기 전 만났던 친구는 파리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수술을 받아도 늦지 않을 텐데 왜 그렇게 서둘렀냐며 말을 했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나는 이가 네 과거의 연애에 대한 기억을 좋음으로 바꿔주었을지 어떻게 알겠냐면서. 나는 친구의 말에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을 한다는 건 무의미한 일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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