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원희 변호사 _ 법무법인 디라이트
스위스에 있는 인구 3만 명의 작은 도시 주크(Zug)는 자칭타칭 ‘크립토밸리’(Crypto Valley)로 불린다. 실리콘밸리에 빗댄 이름이다.
2세대 블록체인 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이더리움이 스위스에서 발행됐다. 지난해 진행된 대형 ICO(신규 코인발행을 통한 자금조달) 중 Tezos, Bancor, DAO, Status 등 4개가 스위스에서 진행됐고, 지난해 5월 국내 최초로 ICO를 진행한 보스코인도 마찬가지다. 이더리움 재단을 비롯해 Bancor, Xapo 등 유명 암호화폐(가상화폐) 재단이나 스타트업도 주크에 둥지를 틀었다. 국내 최초의 ICO도 스위스에서 진행됐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스위스를 택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스위스의 친화적인 암호화폐 정책이다.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듯 아직 ICO를 직접 규율하는 법률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규정이 없기 때문에 ICO를 못한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의 규제 틀 안에서 ICO를 허용한다. 물론 방관하는 것은 아니다. 스위스금융시장감독기구(FINMA·Swiss Financial Market Supervisory Authority)는 지난해 9월 ICO 가이던스를 제시했다. 크립도밸리 협회도 자체적으로 ICO 행동준칙(Code of Conduct)을 공표했다.
또 다른 스위스의 강점은 예측 가능한 선진적인 금융시스템과 안정된 정치다. 여기다 블록체인 산업이 활성화되어 있다 보니 관련 세미나, 밋업 등 행사가 많아졌다. 최신 기술이나 정보 교류가 가능하고, 블록체인 전문 엔지니어를 구하기도 상대적으로 쉽다.
최근 FINMA는 ICO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FINMA는 토큰 또는 코인을 3가지 구분했다. 첫 번째 유형은 지불형 토큰(Payment Token)으로 재화나 서비스 제공에 대한 대가로 사용된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이 속한다. 두 번째는 유틸리티(기능형) 토큰으로 애플리케이션(앱)이나 서비스를 사용할 때 필요하다. 마지막은 자산형 토큰으로 재산적 가치가 포함돼 있다. 회사 지분, 이익 분배 등에 사용된다. 블록체인 위에서 물리적 자산의 거래를 돕는 토큰도 자산형으로 분류된다. 물론 토큰의 성격은 중복될 수 있어 유틸리티 토큰이면서 자산형 토큰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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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큰은 성격에 따라 관련 규제가 적용된다. 만약 위에서 언급되지 않은 증권형(securities)에 해당 되면 증권 관련법을 따라야 한다. FINMA는 지불형 토큰을 원칙적으로 증권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향후 새로운 법률이나 판결에 따라 증권으로 포섭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또 유틸리티 토큰도 토큰의 유일한 목적이 앱이나 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위한 것이라면 증권이 아니다. 그러나 부가적으로 투자의 목적을 가진다면 증권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상당수 ICO 프로젝트들이 서비스의 제공 기능 없이 유틸리티 토큰만 발행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FINMA가 증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FINMA는 “자산형 토큰은 증권에 해당된다”고 분명히 밝혔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ICO 프리세일 단계에서 토큰을 제공하지 않고 추후 토큰을 지급받을 권리만 부여한다면 토큰의 성격과 무관하게 증권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증권에 해당되는 경우 토큰 발행업체는 스위스의 증권 관련 절차를 따라야 한다.
그 외 다양한 규제의 적용 가능성을 열어놨다. 가령 토큰을 발행하면서 토큰 보유자에게 환불을 약속하면 예금으로 해당해 은행업 면허를 요구할 수도 있다. ICO를 통해 조달한 자금을 제 3자에게 맡겨 운용하면 집합투자기구법 적용 여부를 살펴봐야 한다. 특히 지불형 토큰은 자금세탁방지법이 적용돼 관련 절차를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언뜻 보면 기존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불형 토큰이나 유틸리티 토큰이 증권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큰 변화다.
모든 것의 양면이 있듯이 스위스 ICO가 쉽지만은 않다. 실무상 갖가지 어려움이 직면하게 된다.
먼저 상대적으로 많은 비용과 시간을 요구한다. 스위스는 전통적으로 법률비용이 높다. ICO 법률자문 비용도 비싸고 절차를 밟는 기간도 길다. 특히 최근에 ICO가 몰리면서 전문 로펌들은 수 개월씩 업무가 밀려있다. 따라서 운영자금이 충분하고 일정이 여유롭고, ICO 규모가 클 때 스위스를 선택하면 좋다.
또 다른 난제는 ICO 규제정책과 금융기관 업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ICO가 법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은행이 필요한 계좌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위스는 법인이나 재단을 설립할 때 은행에 에스크로 계좌를 먼저 개설하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현실은 은행들이 암호화폐 관련된 곳에는 신규 계좌를 거의 열어주지 않는다. ICO를 위해 설립된 신생 법인은 아주 힘들다고 보면 된다. 은행에 신설 법인이나 프로젝트의 성격을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 수 주가 걸리기도 한다. 스위스에서의 ICO를 고려하고 있다면 법인 설립 단계부터 먼저 고민해야 한다. 물론 현물출자를 통해 에스크로 계좌 없이 법인을 설립할 수도 지만, 출자하는 현물에 대한 감정을 받아야 한다. 절차가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또 스위스에서 ICO를 할 때 법인이 좋은지 재단이 좋은지 묻는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재단을 추천하지 않는다. 재단은 비영리 기관인데, ICO를 하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영리 목적이다. 영리 목적의 사업을 굳이 비영리로 포장할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ICO를 통해 발행되는 토큰의 일정 비율을 설립자들이 갖게 되는데, 비영리 재단의 목적에 맞지 않고 세금 이슈도 나온다. 또 비영리 재단은 독립적으로 운영돼야 하고 ICO를 통해 확보된 자금은 오로지 재단의 목적사업에 맞게 사용돼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ICO 자금은 목적과 딱 맞지 않게 쓰인다.
결국 충분한 자금, 준비할 시간이 있다면 스위스가 좋다. 국제 신뢰도를 높일 수 있고, 예측 가능한 금융시스템 덕분에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하다. 뒤집어 말하면 법인·재단 설립이 쉽지 않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법률 및 회계·세무 비용이 비싸다는 점은 유념해야 한다.
(서울경제 201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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