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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Oct 12. 2020

버드 박스 - 험난한 부모의 삶

Bird Box, 2018


'버드 박스'는 색다른 소재로 만든 묵시록 영화이자 코스믹 호러물로 보이지만, 사실 그리 새롭진 않다. '쳐다보기만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는 설정은 M.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해프닝(2008)'과 흡사하다.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아이들을 이끌고 고행의 길을 나서는 주인공의 모습은 코맥 매카시 원작의 '더 로드(2009)'와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미스터리 스릴러가 추구하는 서스펜스는 모두 히치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런 종류의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방식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미스터리의 근원을 파헤치는 주인공의 뒤를 따라가거나, 혹은 미스터리는 끝까지 불가지의 영역에 남겨두고 그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버드 박스'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한다. 


목격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영화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 역시 그 존재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절대적인 공포 앞에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허무하게도 반목과 대립뿐이다.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앞에 선 인간들의 대처 방식이다. 


어쩌면 그것은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공포인지도 모른다. 그것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두려움인지 환희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피하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음은 우리를 천천히 잠식한다.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살아있는 어느 누구도 죽음 후의 일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미스터리한 존재는 '죽음' 그 자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스터리 스릴러로서의 '버드 박스'는 조금 색다를 뿐 그리 흥미롭진 않다. 새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설프기도 하다. 영화는 서스펜스가 필요한 지점에서 머뭇거리며 재난 영화로 돌아선다. 전형적인 인물 군상들을 나열식으로 보여줄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제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은유적인 이야기로서의 '버드 박스'는 좀 흥미롭다. 영화는 서로 다른 시점의 이야기를 교차편집해 보여준다. 재난이 시작된 시점부터의 생존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맬러리(산드라 블록 扮)가 마지막 남은 아이들과 살 길을 찾아 강을 따라 내려가는 시퀀스가 교차된다. 이는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주인공이 진정한 어머니로 거듭나는 고행의 과정임을 의미한다. 뱃속에 아기를 가진 상태로 초유의 재난을 맞이한 주인공은 결국 아이들과 셋만 남아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부모의 삶은 결국 끝이 어딘지 모를 강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흘러가는 것과 같다. 곳곳에 급류와 악인이 도사리고 있고,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노젓기를 쉴 수 없다. 무엇도 장담할 수 없는 위험 앞에 시행착오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끈을 매달고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것뿐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라는 얇디얇은 끈은 때론 무엇보다도 강한 생명줄이 된다. 


아이들을 함께 보호하던 톰(트래반트 로즈 扮)이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이런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라크 파병 중 전쟁터를 걸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던 아버지가 보았는데, 어느새 그들을 호위해 주는 게 매일 아침 일과가 됐고 그들이 아직 학교에 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는 이야기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과 맞물리는 좀 뻔한 설정의 대사지만, 그래도 인간에게 희망이란 어떤 것인지 다시금 일깨우는 울림이 있다. 



어찌 보면 강을 따라가는 여정은 탄광의 갱도를 따라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눈을 완전히 가리고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버드 박스'의 새들은 정체불명의 존재가 엄습해올 때 비상경보 역할을 하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Canary in a Coal Mine)'와 같은 존재다. 동시에 '새가 살아있는 동안은 우리도 살 수 있다'라는 희망과도 같은 것이다. 


'버드 박스'는 어찌 보면 역설적인 표현이다. 새는 상자 안에 갇혀 있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증유의 재난에 처한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은 눈 뜰 수 없어 캄캄한 '버드 박스'와도 같고, 인간은 그 안에 갇힌 새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그렇게 갇혀 있을 존재가 아니기에 '버드 박스'는 희망의 다른 표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더 로드'의 어머니 버전으로 보이는데, '더 로드'의 '불을 옮기는 사람들' 표현에 빗대자면 '버드 박스'의 맬러리는 '새를 옮기는 사람'인 셈이다. 


우리는 눈을 가리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게 결국 인간의 숙명이다. 스스로가 만든 공포를 겨우 이겨내고 언제든지 덮쳐올 수 있는 죽음을 피해 가며 강물과도 같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로 흘러간다. '버드 박스'라는 작은 희망을 들고서 말이다. 이 험난한 과정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아이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력을 다해 다음 세대를 지키는 것뿐이다. '버드 박스'의 은유는 단순하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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