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발란스에 맞는 옷을 입은 캠페인
뉴발란스라는 스포츠 브랜드에서 마케터로 근무한 지 올해로 6년째입니다. 그동안 참 많은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만, 이토록 무겁게 지나간 캠페인은 없었습니다. 뉴발란스 #아빠의그레이 캠페인이요.
#아빠의그레이 라는 캠페인을 오늘로써 어느 정도 마무리를 한 것 같네요. 글로벌 본사 리포트며 브랜드 내부 발표자료, 요청 들어온 보도자료, 계약서 등 페이퍼로는 정리를 했지만(멀미날 정도로요), 그중 어느 곳에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하고자 브런치에 글을 적습니다. 개인적으로 소화가 필요해서요.
#아빠의그레이 캠페인은 1차원적으로 설명하자면 뉴발란스 그레이로 아빠를 변신시켜드리는 캠페인이었습니다.
지난 8월 14일부터 9일간 뉴발란스 라이프스타일 인스타그램 프로필 링크를 통해 신청을 받았고, 그 시작부터 뜨거웠습니다. 감사하게도 3천 명이 넘는 자녀분들이 신청해주셨고, 그중 스무 분의 아빠를 모셔 뉴발란스 그레이 신발을 활용한 퍼스널 스타일링, 바버샵 클래식 커트, 화보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9월 5일에는 한 자리에 모셔 배우 윤승아 님과 함께 grey day 행사를 진행했구요.
글로벌 본사로부터 grey day에 대한 얼럿을 처음 받은 건 4월 5일이었습니다. '작년에 iconic 574 런칭하면서 grey day 했던 거 기억나지? 올해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9월 5일에 동시에 할 거니까, regional plan 공유해줘.'라는 메일로요. 4월이면 저는 뉴발란스의 대표 모델 중 하나인 990이라는 신발의 다섯 번째 버전 런칭 준비로 정신이 없었을 때였어요. 6월이 되어서야 '아 이제 진짜 해야겠구나'싶어 글로벌이 제시한 세 가지 키워드만 가지고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New Balance. Grey. Family.
브랜드 입장에서 이 캠페인을 한마디로 wrap up 하자면 '뉴발란스니까 가능한 캠페인이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뉴발란스는 여느 스포츠 브랜드처럼 경쟁, 승리, 최고를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저 나 자신의 색을 지키며 묵묵히 나아가고자 할 뿐이죠. 이런 뉴발란스에게 grey는 컬러 그 의상의 의미입니다. 한국 고객들에게 뉴발란스 그레이는 스티브 잡스와 같은 유명인사의 운동화를 통해 인지되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컬러보다도 고유하게 브랜드의 정체성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화려하지도 강하지도 않지만 가장 뉴발란스답다고 할까요.
이러한 그레이 컬러를 통해 어떻게 브랜딩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뉴발란스 재팬에서 편의점의 간판부터 조명, 집기, 통조림 하나까지 모두 그레이로 컬러링 한 행사도 찾아보고, 팬시한 장소에서 브랜드 헤리티지를 보여줄 수 있는 행사를 할까, 홍대와 성수동에 압도적인 옥외광고를 할까, 홍대 매장 앞에 거대한 그레이 벤딩머신을 설치할까, 최근 트렌드인 디지털 기반으로 O2O의 끝판왕을 보여줄까. 수많은 아이디어와 기획들이 오갔습니다.
우리 답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담당자인 저도, 보고를 받는 팀장님도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뉴발란스에게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패션쇼를 하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객에서부터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9월에 우리 고객들에게 가족은 family는 어떤 의미일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needs가 있는지를 고민했습니다. 추석이 있었어요. 흔히들 5월이 가정의 달이라고 하지만 우리 고객에게 family, 부모님을 생각하는 시기는 9월이었습니다. 조금 더 좁혀보았습니다. 그럼 뉴발란스 코리아의 grey day는 아빠로 가자!
왜 family 중에서도 아빠였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엄마의 그레이도 해주세요.'라는 댓글도 적지 않게 보았구요. 그 이유는 아빠의 프로필 사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 프로필은 나인가 싶을 정도로 화려하고 예쁩니다. 엄마도 친구분들과 놀러 다니며 예쁜 사진을 많이 찍으시구요. 그런데 아빠의 프로필 사진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빠들의 프로필 사진의 50%는 자연경관이었고, 35%는 자녀들 사진, 15%는 당신의 사진이었지만 그나마도 굉장히 엉성한 셀카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아빠를. 뉴발란스. 그레이로. 변신시켜드리면 어떨까?
그러던 중, THE NEW GREY를 만났습니다. 지금도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지만 이름도 THE NEW (BALANCE) GREY였어요. 이미 우리 아빠 프사 바꾸기 대작전이라는 훌륭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 대한민국 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메이크오버 컨셉 매거진이었습니다. 와디즈에서 두 차례나 펀딩을 성공적으로 진행했고, 미니, 삼성카드와 같은 브랜드와도 협업을 진행했었더라구요.
THE NEW GREY로 인해 뉴발란스 #아빠의그레이 캠페인은 완성체가 되었습니다. 이제야 뉴발란스에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어요. 그것도 굉장히 편안하고 멋있는 옷을요.
결과물만 보아서는 짠! 하고 변신할 것 같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100 사이즈 상의를 입고, 32 허리사이즈인 아빠여도 정말 한분 한분 체형이 달라 착장을 준비하는 것도, 카메라 앞에서 어색해하시는 아빠들의 포즈와 표정을 이끌어 내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촬영에 나가보지는 못했지만 처음 입어보는 스타일의 옷도, 이름조차 낯선 바버샵 커트도, 젊은 애들이나 신는 운동화도 얼떨떨했지만, 이내 세상에서 가장 자신감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grey day 행사장에서는 사회 보는 저를 아빠 미소로 봐주시고, 밥은 먹으면서 해야지 하며 손잡아주시는 어김없는 아빠였지만요.
30여 개의 캠페인을 진행했지만 이런 캠페인은 처음이었습니다.
현장에 나와있는 내내 가슴이 먹먹한 캠페인도 처음이고, 참여하신 고객분이 제 끼니 걱정해주신 캠페인도 처음이고, 광고가 릴리즈 되는 순간 벅차 보긴 했어도 광고 찍다가 운 캠페인도 처음이고,
3개월 구르다 30초 행복하고 털어내왔던 여느 캠페인과는 분명 다른 캠페인이었습니다.
마케터라는 이름을 달고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많은 분들의 연락과 응원을 받은 적은 처음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제가 이토록 가슴 뛰는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었던 건, 함께 웃어주고 같이 한숨 쉬어주고 토닥여주고 하트 날려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을 압니다.
사무실에서는 말로 때리시다가도 갑자기 다독이는 카톡으로 늘 더 나아질 수 있게 해 주신 팀장님(이게 기획서라고 써왔냐고 하셨던 말 아직 아파요.) 그리고 우리 뉴발란스 마케팅팀. 쉴 틈 없이 함께 달려와주신 THE NEW GREY와 여대표님. 라이브 당일까지도 색감을 좀 더 만져보았다고 다시 보내주시겠다고... 최고의 광고를 만들어주신 쌤 감독님. 저만 보고 본 프로젝트도 뒤로 하고 그레이 데이 행사를 완벽하게 만들어주신 모츠 김팀장님. '편집장님....저 그레이 데이 스케치 필요해요.' 하는 S.O.S에 바로 달려와서 함께 해주신 가족과 같은 스트릿풋과 작중설정까지.
머리로만 그렸던 것들을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만들어주시고 함께 해준 사람들 덕에,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방향이 3번 뒤집어지고 기획서 파일을 62개 남기고 나서야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내 새끼였습니다(이 파일들은 안 지우려구요.).
그리고 6년 간 드래곤볼처럼 모아 온 마케팅 퍼즐을 총동원했고, 목숨 걸던 워라밸도 접어두었고, 감정적으로도 많은 것을 소모했던 3개월이었습니다.
이제 그레이의 여운은 이 글에 남겨두고 또 다른 시작을 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