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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주말 목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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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천고래 Jan 08. 2019

뜻밖의 온천

주말 목욕_서울특별시 서초구 <황금온천>


겨울이다. 온몸을 얼릴 것 같은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면, 온천이 절로 그리워진다. 그럼에도 온천 한 번 다녀가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아마도 온천이라고 하면 유명 지역만을 떠올리기 때문은 아닐까. 온양, 유성, 수안보, 부곡, 백암, 척산……. 그런 곳들 말이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의외로 가까운 곳에도 온천이 있다.


이쯤에서 소개할 자료는, 행정안전부에서 매년 발간하는 '전국 온천 현황'이다. 2018년 기준으로 전국에 총 233개의 온천이 있고, 인천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온천이 있다. 이 자료를 알고 난 뒤부터 나는 종종 어딘가로 가게 될 때 그 지역에 온천이 있는지부터 찾아보게 됐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온천 역시 이 자료 덕분에 알게 되었다. 정말 뜻밖에도, 친구가 잡아 준 호텔에서 도보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호텔이 마치 내 집인 양, 여행용 목욕 가방을 챙겨 들고 친구와 함께 온천으로 향했다.


황금 온천 간판이 초록과 빨강으로 사이좋게 반짝이고 있었다
2003년도에 온천이 터졌고, 게르마늄천이라고 한다.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정확히는 탄산수소나트륨천(Na-HCO₃)
요금은 좀 비싼 편. 찜질방과 겸해서 그런것 같고, 인근의 다른 찜질방들에 비해서는 저렴한 편이라고 한다.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걸었다. 시끄러운 번화가를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 근처는 대단지 아파트와 학교가 빼곡하게 들어차 밤에는 조용한 동네였다. 멀리서 붉은색의 '황금'과 초록색의 '온천'이 번갈아가며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어느 도시에나 있는 흔한 상가 건물 4층에 있었는데, 건물의 가장 목 좋은 위치에 온천 간판이 크게 걸려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요금표도 걸려있었다. 1인 12,000원이라니, 처음에는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찜질방과 겸해서 운영하는 것치곤 근방에선 괜찮은 가격이었다.


아주 널찍한 프론트. 친절하셨다.


예상보다 더 널찍하고 깔끔한 데스크였다. 종업원의 수도 많고, 비품이나 열쇠도 빼곡했다. 손님도 제법 많았다. 몇 가지 목욕 도구 값을 치르고 옷과 수건을 받아 곧장 탕으로 향했다. 목적은 온천이니까! 여기서 밝혀두는데, 나는 사실 찜질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미동도 없이 물에 잠기는 편이 더 좋다. 다행히 함께 동행한 친구도 찜질보다는 탕 취향이라고 했다. 새삼 이래서 친구인가 싶었다.


탕 내부는 평범한 동네 목욕탕 정도였다. 조금 크긴 했지만 그렇게 특별할 건 없었다. 빠르게 탕을 훑은 뒤 앉았을 때 탕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골랐다. 앉아서 몸을 씻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폈다. 가운데 커다랗게 탕 세 개가 붙어있고 뒤쪽으로는 사우나와 세신실이 있었다. 단순한 구조다. 특이한 점이라면 사우나 앞에 선베드가 두어 개 놓여 있다는 정도. 햇볕도 없는데서 선베드는 이상하다고 생각 한순간 아주머니 한 분이 느긋하게 자리를 잡고 누웠다. 세상에 쓸데없는 건 없나 보다.


몸을 다 씻고 탕으로 향했다. 온천이라기에 수질이 궁금했다. 물론 큰 기대는 없었다. 이런 도심 속 온천에서 대단한 수질을 바라기 힘드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다소 밋밋하긴 했어도 수돗물과는 확실히 다른, 보드랍고 매끄러운 촉감이 분명 있었다. 친구와 나란히 몸을 담그고 미뤄뒀던 이야기를 했다. 고단한 서울 살이며 쉽게 풀리지 않는 일들에 대해 서로 위로를 건네다가, 요즘 덕질하는 이야기도 했다가, 실없는 옛날 얘기도 했다. 그러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각자 취향대로 흩어져 목욕을 즐겼다. 나는 침탕에 드러누워 깜빡 졸고, 열탕에서 부르르 몸을 떨고, 싱겁게 냉탕에 가서 십 초도 못 버티고 나오기도 했다. 어쩐지 혼자보다 즐거웠다.


온탕에서 마지막으로 몸을 담그던 때, 뜻밖의 발견을 했다. 구석진 자리, 조명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곳에 미처 못 봤던 탕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이름이 '일본탕'이었다! 강남에서 일본 탕이라니, 온천의 신이 내게 무슨 숙제라도 내준 게 아닐까 생각하며 스스로 호기심의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 미적지근한 탕에 한참 몸을 담그며 이름의 이유를 고심해봤다. 일본에서 입욕제를 사다가 푼 걸까? 일본의 무슨 탕을 말하는 걸까? 혹시 탕이 바위로 만들어져서 그럴까? 뭔가 바닥보다 낮게 판 모양새가 일본에서 많이 본 욕조 같은데 그런 걸 말하는 걸까? 친구랑 둘이서 머리를 맞대도 도저히 답을 알 수 없었다. 


나오는 길, 아까의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카운터의 직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온천 잘하고 갑니다. 물이 좋더라고요. 그런데 여탕에 있는 일본탕, 그건 이름이 왜 그런 거예요? 이유가 따로 있나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인지 직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글쎄, 그게 이름이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더니 활짝 웃으며 물이 좋으면 자주 와달라고, 할인 쿠폰도 판다며 영업 멘트로 끝마무리를 맺었다. 마지막까지 영업이라니, 역시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했다.  


왠지 비싼 온천을 했으니 우유도 비싼걸로 먹고 싶어서.


그러거나 말거나 돌아가는 길은 무척 가뿐했다. 일본탕의 이유가 별거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별거였어도 상관없었다.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목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익숙한 발걸음으로 편의점에 들어가 우유 하나를 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일본 탕에 갔다 왔더니 고소하고 진한 우유가 당겼다. 단숨에 우유를 들이켰다. 여기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어졌다. 서울인지 일본인지, 호텔인지 우리 집인지. 다만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날은 꿈도 꾸지 않고 잠들었다. 




온천 정보

황금온천ㅣ서울특별시 서초구 사임당로 143 

24시간 운영, 연중무휴 ㅣ 성인 12,000원, 소인 10,000원 *조조할인 있음 ㅣ 수건 및 찜질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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