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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포근 Mar 22. 2020

외진 마음

당신과 다투고 난 자리

마음이 쓸쓸한 일요일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나는 오늘 쓸쓸해서 기운이 났다. 결단력 있게 단숨에 일어나 샤워를 했고 샤워기가 흘려보내는 시원한 물줄기를 보고도 씩씩하게도 눈물 한 줄기조차 흘리지 읺았다. 헝크러진 머릿결에 어젯밤의 속상함이 묻어있는 것 같아서 샴푸질을 두 번이나 했다.


얼굴이 상해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베개 속으로 이불 속으로 얼굴을 원망스럽게 파묻은 밤이 지나고나면 늘 그랬다. 백열등 아래 오돌토돌해져버린 얼굴을 가만히 보며 거짓말도 하지 못하는 내 얼굴이 순간 미워져버렸다. 딱히 나가야할 일 같은 건 없었지만 얼른 화장을 해서 간밤의 나를 덮어버리고 싶었다.


어젯밤 하소연을 하며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다 즉흥적으로 잡았던 친구와의 약속이 취소됐다.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사실 나는 괜찮았다. 친구를 만났어도 속상하고 허전한 마음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그저 조금 더 쉽게 외면할 수 있게될 뿐이었을테니까. 함께 짊어져주는 것은 하소연을 들어준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미안하다는 친구의 말에 괜찮다고 걱정 말라는 카톡을 보내는 사이 젖어있던 머리카락의 겉면이 살짝 말라 붕 떠 있었다.


TV를 틀어 볼 프로그램을 찾아다녔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지난 회들의 요약을 쭉 둘러보다 좋아하는 가수들이 많이 나온 편을 발견했다. 이끌리듯 시청하기 버튼을 누르고 한 시간 내내 노래에 푹 빠졌다. 작년 크리스마스 특집이었다. 여느 크리스마스 특집과는 다르게 슬프고 익숙한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소리를 최대로 키우고 따라부르기도 하며 곧 눈물을 흘릴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못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엔딩곡으로 신나는 노래가 나오자 이제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이 쨍하고 하늘이 파랬다. 창문을 열어둬도 공기가 싸해지지 않는 걸 보니 밖은 하염없이 봄인 것 같았다. 옷장 깊숙한 곳에서 봄을 마음으로 맞이하겠다는 다짐과 같은 살색 스타킹을 꺼내 신었다. 조금 추울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선물 받은 예쁜 립스틱을 가볍게 발라 생기를 넣어주니 그래도 언뜻 내 얼굴도 봄 같아보였다.


지하철을 타고 50분을 달려야하는 먼 곳까지 책을 읽으러 왔다. 어느 방송사에서도 다녀간 유명한 곳이라는데 내게는 어젯밤 얼굴을 부비던 이불 속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세 권의 책을 집어 한 문장씩 곱씹어가며 글의 내용과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보려는데 속절없이 온 문장이 당신이다. 책을 읽다 덮어두고 당신 생각에 잠겨 두 장의 일기를 썼다. 그러다 다시 책을 읽고 당신이 보이는 문장이면 꾹꾹 눌러 새기듯이 노트에 옮겨적었다. 내가 보이는 문장이면 망설이며 곁눈질로 옮겨적었다.


당신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도 얼마간은 나처럼 그리울까. 얼마간은 속이 후련하겠지. 또 얼마간은 원망스럽겠지. 그러다가 이따금씩 하는 수 없이 나를 떠올리기도 하겠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은 화요일인데 오늘 밤에 당장 당신을 보고싶다고 말하고 싶은 내가 나도 미웠다. 그런데 두 밤이나 당신의 목소리 없이 잠든다는 게 사실은 큰 일은 아닐텐데 사무치게 슬프다.


아까는 커피를 아침부터 너무 많이 마셔서 심장이 두근거려서 원피스를 입고도 부끄럽게도 다리를 심하게 떨었고, 책을 읽는데 이상하게 몸 구석구석이 가려워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내 몸이 당신이 잠시 비운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난감하게 한다고, 당신에게 말하듯 나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시간이 고장난 것처럼 흐를 것 같아서 기어코 한 편을 적어냈다. 다른 글들은 널리 읽혔으면 했지만 이 글은 그냥 스쳐가듯 읽히기를 바란다. 미안해요.


미안함에 쓸쓸한 일요일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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