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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mi Kim Pottery Dec 22. 2017

은미야, 혼자 해봐!

강한 엄마의 가르침과 못난 막내딸의 뒤늦은 깨달음    

현재 내 브런치의 구독자가 6명밖에 없으니, 이번 글은 서투른  나의 글을 최고로 재미있다고 착각하고 계시는 우리 엄마에게 이 글을 쓰겠다.

      





"은미야, 요즘은 글 연재 안 하니? 엄마 심심하다 빨리 글 좀 더 보내줘!"


오랜만에 한국에서 걸려 온 엄마의 전화. 한결같이 밝은 목소리다. 2주 넘게 죽을 것만 같은 심한 감기를 걸렸다가 이제 정신을 좀 차리셨단다.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엄마가 아팠다는 소식을 전하면 심장이 쿵쾅거린다. 일 년 안에 영국 생활을 접기로 결정했다. 


친구들은 아이를 낳아봐야 진짜 어른이 되고 엄마를 이해한다는데, 나는 내 아이가 없어 육아를 하진 않지만, 그 시간에 혼자 도자기를 하면서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예전에 놓쳤던 부분들이 내 심장과 머리를 스쳐간다. 내가 가족에게 얼마나 이기적인 막내였던 걸까..







자꾸만 스쳐 지나가는   엄마의 모습들


도자기 페어를 나간다고 혼자 짐을 포장하고 트럭을 불러 페어 장소로 이동할 때면.. 몸이 너무 힘들어 한 숨이 몇 분에 한 번씩 나온다. 순간 엄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면 나는 다시 한번 감정을 꾹- 누른다. 만취해 식당 유리창을 깼던 거친 손님을 경찰서에 신고하고도, 오늘 만들어야 할 식재료를 사러 다시 새벽시장에 운전을 하고 갔을 엄마. 시장을 갔다 와서 고 3인 나를 학교 앞까지 운전해 주시고는.. 4시간 눈을 부치고 다시 식당 문을 열었을 엄마. 얼마나 고되었을까.


물레를 차는데,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고 작업을 하다 보니 허리 왼쪽이 자꾸 아프다. 이러다 왠지 허리 디스크가 올 것 만 같아 멈췄다. 다시 엄마의 모습이 그려진다. 작은 부엌에 앉아 배추와 무를 자르며 매일매일 김치를 담글 때 엄마는 얼마나 허리가 아프셨을까.


거친 흙으로 물레를 차다 보니 손과 팔이 찌릿찌릿 아파와 집에서 이틀을 쉬고 있는데, 평생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또 엄마 생각이 났다. 부엌일을 오래 하다 보니 손에 류머티즘 관절염이 오고 손가락들이 바깥쪽으로 휘어졌는데도, 그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어렵게 접어 뜨거운 고기를 썰던 엄마의 모습.


유약 가루를 물에 푸는데 잘 안 풀린다. 20분째 가루를 채에 거르다가... 인내심의 한계가 왔는지 악!! 소리를 지르고 다 엎어버리고 싶었다. 근데 또 엄마 모습이 스쳐간다. 나는 나 혼자 사는 것도 이렇게 앞이 막막한데 세 자식이 딸린 엄마는 어떠셨을 까. 나는 힘들면 작업을 며칠 쉬어도 되지만, 멈출 수 없는 식당일 때문에  하루 14시간이 넘게, 365일, 그렇게 17년을 이어오는 엄마는 어떠셨을 까.. 


자식들 앞에서는 울지도 않고 원더우먼 보다도 더 강한 모습만 보여줬지만, 자식들이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는 눈물도 많이 흘리셨겠구나 싶다. 나는 왜 이제 와서 깨달은 걸까.     








엄마와의 조각조각 기억들... 그 안에 가르침


유치원 버스가 도착하는 곳까지 7살 꼬마의 걸음으로는 15분이 되던 거리를, 등교 첫날 딱 한번 같이 가 주시더니 다음 날 "은미야 오늘부터 너 혼자 가봐! 집에 올 때도 같은 길로 오면 돼!"라신다. 동네 친구 수경이네 엄마는 3분 거리를 데려다주고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데, 왜 우리 엄마는 나를 안 데려다주는 걸까. 나도 엄마 손잡고 수다 떨면서 같이 걷고 싶은데.. 아침에 수경이와 수경이네 엄마를 볼 때면 가끔 서러울 때가 있었다.


등교 후, 일 나간 엄마한테 집에 왔다고 전화를 했더니, "응, 은미야 어제 가스레인지 키는 거 가르쳐 줬지? 물 끓으면 라면이랑 수프를 넣고.... 그렇게 먹어 봐!" 나는 가스레인지가 불이 날까 봐 너무 무서웠는데 그냥 불을 켜란다. 나는 왜 집에 오면 엄마가 없는 거지? 오빠 언니가 올 때까지 나 혼자 거울을 보며 중얼거리며 시간을 때웠다.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다. 등하교 길이 아주 가파르다. 하루는 심하게 넘어져서 체육복에 구멍이 났고, 무릎에서 피가 흐른다. 그런데 내가 넘어진 걸 본 6학년 오빠 두 명이 엄청 낄낄 거리며 웃는다. 너무너무 창피해서 집에 와서 저녁 요리하는 엄마를 붙잡고 학교 오빠들이 비웃었다며 엉엉 우는 나에게 단호하게 건네는 엄마의 말, "은미야, 잊어! 네 앞에서 잠깐 웃었지만 그 오빠들 집에 가면 아무도 너 생각 안 해. 그런 건 바로 잊는 거야!"

'아하!'

엄마는 그 날  단순하지만 직접적인 한마디로 나에게 끄떡없는 자존감을 심어주셨다.


아직 개발이 덜 된 런던 동쪽 하크니 동네를 갈 때마다 노숙자를 자주 접한다. 걷다 보면 10분에 한 명씩은 보는 듯하다. 전 세계 부유한 이들이 몰려있어 집값이 어마어마한 런던이라는 이 화려한 도시의 뒷면에 아직도 노숙자가 있다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때 또다시 떠오르는 엄마의 모습. 어릴 적 집 앞에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노숙자 아저씨 한분이 왔다 갔다 거리는 날이면 엄마가 갑자기 나를 찾았다.

"은미야, 집 없는 아저씨 지나가신다. 빨리 500원 주고 와! 아저씨 가시기 전에 빨리빨리!"

나는 큰 슬리퍼를 신고 아저씨 떠나시기 전에 달려 나가야 했다.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교육시킨 적은 없다. 다만 도울 수 있는 조건이 될 때마다 작게나마  나누는 모습을 지금까지 보여주면서,  부를 축적하는 목적이 나와 내 가족의 편함 뿐만이  아니라는 것, 그 이상의  비전을 은연중에 심어주신 듯하다.


'엄마,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하나하나가  다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요. 나를 키우는 방법이셨군요. 내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강해졌으면 해서. (그 부작용으로 이제 너무 혼자 잘 놀다 보니 커서도 집에 전화 잘 안 하는 딸이 돼버렸지만요 아하하) 귀여운 자식들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을 나가야 했던 상황이었군요....'








내 안에 작은 다짐, 그리고 제주도에서 함께할 나머지 시간들



"글쎄.. 외할아버지/할머니 수명으로 봐서는 엄마도 이제 10년 좀 더 살까 모르겠네.."


엄마가 10년이란 시간을 이야기했던 날,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한 기분이었다. 그날은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나는 엄마에게 이 나이가 되도록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데, 함께 할 시간이 10년밖에 안 남았다고? 지금까지 내가 막내딸로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지?


모순 덩어리 막내딸은 작은 다짐을 해야 했다. 도예를 시작한 후로 아직까지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여태 놓쳤던 부분을 이제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제일 중요한 하나는 건진 것 같다. 


'엄마! 마지막 부탁이 있는데, 건강 잘 챙겨서 30년 더 막내딸 옆에 있어줘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너무 감사하고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엄마 곧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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