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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세살이 Apr 26. 2018

공무원 그만두고 여행중인 30대의 성찰기, 슬로바키아2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속도에 대해 고민하고,

그 중 어떤 사람들은 느리게 사는 삶을 소망한다.


직장에서 적당한 수준의

보람찬 생산 활동을 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침착한 여유도 가지고,

가족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한국은 워낙 빠른 호흡의 공동체라,

자연히 그 곳에 속해 있는 조직들도

대부분 빨라진다.


조직에 속한 개개인이나

그들의 가족들이 원하는 호흡의 속도에 대해

조직은 무관심하거나 무지하거나

또는 애써 무시한다.


공직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국가의 대소사는

공무원 개인과는 큰 상관없이 결정되지만,

문제의 해결을 위한 계획과 대책을

빠르게 작성하고 보고하기 위해

주무관, 사무관부터 과장, 국장, 실장까지

쉼 없이 뛰어야 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함께

11개월째 여행을 하고 있는 나는

예전보다는 확실히 훨씬 느린 속도로 살고 있다.


우리는 특히 슬로바키아에서 느리게 여행했다.

하루에 2만보, 3만보씩 걷는 날들도 많았다.

슬로바키아의 언덕과 들판들을 천천히 걷다보면

한 집 한 집의 이야기가 궁금한

예쁜 마을들이 나타나 상상력을 자극했다.


느리게 사는 것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배부르고 한가한 소리라거나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고 이야기 하는데,

모두 일리 있는 말들이다.


하지만 느린 삶은 경험해 볼 가치가 있다.

어떤 장소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고,

스쳐 지나갔을 사람과 이야기 할 수 있었고,

쉬어 가는 것에 대해 유연해 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 옆에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슬로바키아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오라바 성은

수많은 슬로바키아의 성들 중에서도

잘 정돈되어 있어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드라큘라를 비롯해

여러 영화의 배경 장소가 되었을 만큼

우리가 생각하는 중세시대 성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사실 두세 시간 정도면

이 성을 한 바퀴 둘러보기에 충분하지만,

우리는 근처에 하룻밤 숙소를 잡고

이 아름다운 성의 낮과 밤을 천천히 즐겼다.


낮에는 성, 마을, 울창한 산이

기가 막힌 조화를 뽐낸다면,

밤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성의 모습이 조금은 오싹하다.



슬로바키아는 숲과 나무가 울창해서

벌목이 주된 산업이었던 지역들이 있다.

여러 이유로 벌목이 중단된 곳들 중에

나무를 운반하던 철로 위를 달리는

꼬마 기차를 탈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그 기차를 꼭 타 보고 싶어서,

아쉽게도 대중교통은 가지 않는 그 기차역을 향해

인적 없는 가파른 언덕길을

한 시간 넘게 오르내렸다.


뙤약볕 아래 우리는 점점 지쳐갔고

자동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길을 뒤돌아보며

얻어 탈 차 한 대만 지나갔으면.. 생각했을 때

돌을 구르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기적처럼 들려왔다.


차에 타고 있던 슬로바키아 부녀는

흔쾌히 우리를 태워 주었다.


우리가 만난 슬로바키아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이들도 낯선 동양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방문해 준 것 자체를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무사히 기차역에 도착해 탑승한 꼬마 기차는

힘들었던 여정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그림 같은 풍경 속을 달려 주었다.


돌아올 때 역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30여명의 유치원 아이들이 탄 버스를 얻어 탔다.

이제는 익숙해진 호기심 가득한 시선 속에서

편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많은 슬로바키아 사람들이 이곳을 추천했다.


우리가 한 달간 머문 프레쇼프의 숙소 주인도,

체코인 남편의 직장 때문에

2년간 반포동에 산 적이 있다는 아주머니도,

기차역에서 허둥대고 있는 우리를 도와 준,

케이팝에 미쳐 있다는 딸을 가진 아저씨도

타트라 산에는 꼭 가봐야 한다고 말했다.


슬로바키아인들의 자랑인 타트라를

조금은 더 피부로 느끼고 싶어서

케이블카를 마다하고

왕복 6시간 동안 일부 구간을 등산했다.


아쉽게도 하필 그날 날씨가 좋지 않았다.

세찬 비와 바람이 우리를 계속 괴롭혔다.

미끄러운 바위들을 조심조심 밟으며

구간 정상에 도착했지만, 채 10분도 못 되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가

시야를 완벽하게 가려 버렸다.


생각보다 힘든 산행이었고,

한 동안 우리는 온 몸이 욱신거려 고생했다.


느린 여행도 좋지만

그냥 이런 날은 케이블카 탈 걸.



타트라 산과 더불어 슬로바키아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곳이 또 있는데

‘슬로바키아 라이’라고 불리는 국립공원이다.

‘천국의 슬로바키아’ 정도의 의미인데,

때 묻지 않은 슬로바키아의 순수한 자연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우리는 몇 시간 동안만

천천히 하이킹을 하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길을 잘못 들어 가장 험한 코스를 타게 되었다.


이곳은 자연을 최대한 해치지 않기 위해

인공구조물들을 최소화하고 있다.

그 덕에 우리는 아슬아슬한 나무 계단,

절벽에 붙어 있는 난간 없는 철 발판들을

무수히 건너며 의도치 않은 극기 훈련을 했다.


중간 중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을 만큼

힘들고 고된 하이킹이었지만,

나보다 더 씩씩하게 걸었던 아내가 있어서

7시간 만에 목표 지점을 통과할 수 있었다.



슬로바키아의 바르데요프라는 도시에는

예쁘면서도 특색 있는 광장이 있다.

이 도시의 물은 천연 미네랄이 풍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온천을 즐기기도 한다.


우리는 이 바르데요프를

조금 색다른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잠깐의 여행을 위해 방문한 이곳에서

아내가 갑자기 아팠다.

우선 광장의 약국에서 약을 사 먹은 후에

내 무릎을 베고

벤치에 누워 한 숨 잠을 자며 쉬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조용하고 평화로운 광장의 기운,

충분한 휴식이 효과가 있었던지

잠에서 깨어난 아내는 다행히도

기운을 차렸다.


바르데요프는 우리에게 치유의 도시다.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슬로바키아는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었다.


공식적인 여행 정보들이 부족했고

미리 계획할 수 없어서 불안했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내가 생각할 수 없었던 곳들을

가 볼 수 있었다.


슬로바키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작고 볼 것 없다고

겸손해하면서도,

꼭 가봐야 할 곳들을 알려주면서

방문해 준 우리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관광객들의 때가 덜 묻은 산과 들판,

대중교통이 부족해 많이 걸을 수밖에 없었던

여러 성들과 작은 도시들은

우리에게 느린 여행을 선사해 주었고

느린 삶에 대해서도

더 고민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느린 여행이 가져다 준 여유는

자연스럽게 나의 시선을 아내에게로

향하게 만들었다.


내 옆에는 항상 아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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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후 우크라이나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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