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철저히 계획하는 삶을 좋아했다.
계획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 주고,
심리적 불안감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준다.
성과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직장생활은 그야말로 계획의 홍수였다.
대통령, 총리, 장관 등 주요기관 대상 업무계획,
주간, 월간, 분기별, 반기별 업무계획,
각종 정책, 사업, 행사 추진계획까지.
계획을 가지고 회의하고, 진행하고, 평가했다.
아마 정부청사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계획은
하루에도 수백 건이 넘을 것이다.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의 방식은 삶의 방식과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가이드북을 보면서
꼭 가봐야 한다는 핵심 관광지들을 체크했다.
하루하루의 계획을
시간 단위로 정리한 표를 만들고
이를 충실히 따르면서 성취감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가 슬로바키아에서 한 달간 머물렀던
사진 속 프레쇼프라는 작은 도시는
관광이나 여행을 위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곳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 놓아야 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여행의 성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이제라도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블라티슬라바나,
기아차 공장이 있어서 한국인이 많이 산다는
질리나 같은 도시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프레쇼프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 덕분에 우연히 방문하게 된 많은 장소들은
우리의 여행을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 계획 속에만 갇혀 있었다면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순간들을 감사히 겪었다.
계획이라는 것은,
사실은 내가 가진
극히 한정된 지식과 경험의 범주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철저한 계획이 나를 더 성장시킬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가 나를 통제하는 굴레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계획하는 것을 좀 더 좋아한다.
하지만 슬로바키아는
계획만이 정답이 아님을 알려준 고마운 곳이다.
프레쇼프는 슬로바키아에서 세 번째 규모의 도시다.
세 번째라고는 해도,
10만 명 정도밖에 살고 있지 않은 작은 곳이다.
관광지는 더더욱 아니어서 외지인이 거의 없다.
그 흔한 중국인들도 거의 볼 수 없었다.
우리가 숙소 근처 버스 정류장에 처음 내렸을 때,
우리에게 고정된 수많은 시선들을 잊을 수가 없다.
프레쇼프와 우리의 첫 만남은 낯설고 긴장됐다.
그런 우리의 적응을 도와준 사람은
에어비앤비 숙소 주인인 야로 아저씨였다.
집 마당에 예쁜 정원을 갖고 있는 아저씨는
여행책자에는 나오지 않는
슬로바키아의 역사, 명소, 음악, 언어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알려주셨다.
마당 흔들 그네에 아내와 함께 앉아
아저씨의 정원에서 갓 따온 민트로 우려낸
차를 마시는 것은 즐거운 일상이었다.
찻물에 떠 있는 작은 벌레들만 잘 건져내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기농 민트차가 된다.
집주인 아저씨의 취미는 버섯 캐기였다.
아저씨의 제안으로 우리도 몇 번
소쿠리와 작은 칼을 들고 따라 나섰다.
집주인 아저씨의 강아지 아스카도
늘 있는 일처럼 익숙하게 숲으로 향한다.
아마도 현지인들만 방문할 법한
연둣빛 울창한 숲으로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란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재빨리 우리를 가로질러 뛰어 가는 모습은
사실 아직까지도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어리버리한 우리와는 달리
잠시 숲을 한 바퀴 돌고 온 아저씨는
바구니 하나 가득 버섯을 채워 오셨다.
집에 돌아와 아저씨가 바로 해주신 버섯볶음은
우리만의 슬로바키아 대표 음식이 되었다.
지금도 마트 어딘가에서 버섯만 보이면
슬로바키아와 집주인 아저씨가 생각난다.
슬로바키아의 두나예츠 강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폴란드와의 국경에 위치해 있는데,
절반은 폴란드가, 절반은 슬로바키아가
사이좋게 나눠 갖고 있는 인상적인 강이다.
그 곳에서 탈 수 있는 전통뗏목은 꽤 유명해서
국내 언론에도 몇 번 소개된 적이 있다.
문제는 교통편이었다.
프레쇼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강까지 가는 대중교통편을 찾을 수 없었다.
슬로바키아의 관광 인프라는 열악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손때가 덜 묻어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찾아가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난감한 것이 사실이다.
여러 방면을 알아보던 와중에
집주인 아저씨가 흔쾌히 두나예츠 강으로
함께 소풍을 가자고 제안하셨다.
우리는 너무나도 감사하게 아저씨의 차를 타고
두나예츠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슬로바키아의 전통뗏목 위에서 신선놀음을 했다.
프레쇼프 근교에 위치한 스피슈 성은
언덕 위에 우뚝 자리 잡고 있어서
언뜻 보면 금방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성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교통편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어쩔 수 없이 재미나게 수다 중인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여쭤 보니
웃으시면서 그냥 쭉쭉 올라가라고 하신다.
무심하게 서 있는 스피슈 성을 바라보며
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든다.
700년 전 헝가리제국 시대 때 지어져
300년 전에 원인모를 불에 소실되어 버리고,
그 후 그냥 들판에 방치되어 있다가
최근에서야 조금씩 복원된 성이 쓸쓸해 보인다.
이 성에 존재했던 권력, 물질, 사람 모두
지금은 인적 없이 푸르른 들판 속에서 고요하다.
오팔은 그저 나랑 상관없는 보석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집주인 아저씨 덕분에 프레쇼프에
오팔광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슬로바키아는 한 때 오팔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호주나 브라질 같은
신흥 오팔 산지들에 밀려서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광산이 문을 닫았다.
폐광은 했지만,
여전히 광산 근처 돌무더기들을 잘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오팔조각들이 섞여 있는
돌들을 골라 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반짝이는 광물을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뙤약볕 아래 오랜 시간을 쪼그려 있었다.
화려했던 세월을 뒤로 하고,
이제 이곳 오팔광산은 투어 용도로만 쓰인다.
우리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해 주고
특별히 광산의 비밀공간들도 보여줬던
청년 가이드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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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며칠 후 슬로바키아 2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